어두운 터널처럼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산통이 드디어 끝났다. 10개월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기를 처음으로 내 품에 안던 순간. 가슴은 뭉클하다 못해 뜨거워졌다. 병원 회복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화지같이 새하얀 천장 위에 친정엄마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엄마, 난 3.5kg의 아기를 낳기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엄마는 어떻게 4.7kg이 넘는 오빠를 자연분만으로 낳았어?' 목숨을 걸고 오빠를 낳았다던 엄마의 말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엄마가 되던 날은 그렇게 기쁨과 아픔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출산만 하고 나면 모든 게 다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출산은 고되고 힘든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모유수유로 인해 유두가 벌겋게 벗겨지고 부을 때에도. 밤에 한 시간마다 젖을 찾으며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재울 때에도. 행여나 이유식에 덩어리 진 고기가 남아있을까 봐 간 고기를 체에 꾹꾹 눌러 내릴 때에도. 늘 엄마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어리석게도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주말 저녁. 복면가왕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참가한 가수가 ''엄마''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가면 속 가수가 누구인지 알아맞히기 위해 모처럼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 이름만 불러도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죠.
모든 걸 주고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당신께 난 무엇을 드려야 할지.''
노래의 후렴구를 듣던 순간. 노래는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노점 장사를 하시면서까지 나를 뒷바라지하셨던 엄마. 겨울이면 손과 발은 물론 얼굴까지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철없던 시절 친구와 길을 걷다가 장사하시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부끄러운 마음에 아는 체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와서도 점점 더 굽어만가는 엄마의 등과 손가락을 애써 못 본체 외면했다.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로 TV나 라디오에서 ''엄마''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때로는 미안함의 눈물을. 때로는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타임머신처럼 매번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이끌었다.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울고 나면 어느새 속이 후련해지고 편안해지면서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감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가끔은 무거운 갑옷을 입은 것처럼 엄마의 역할이 버거웠던 적도 있었다. '겨우 8년 동안 엄마로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엄마는 어떻게 40년이 넘는 그 긴 세월 동안 엄마로서만 살아왔을까?...'
어느새 아이들이 커서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생겼다. 반찬을 만드는 김에 양을 조금 더 넉넉하게 만들어서 장사를 하시는 엄마에게 도시락을 싸다 드렸다. 하지만 이미 어금니가 다 빠질 정도로 나이가 드신 엄마는 싸다 드린 멸치볶음조차도 잘 드실 수가 없으셨다. 다시 아기처럼 부드러운 음식만 드실 수 있게 된 엄마를 바라보며 그동안 무심했던 내가 원망스럽고 이 상황이 서글펐다. 영원히 내 곁에 계실 거라 생각했던 엄마가 저만치 성큼 멀어진 느낌이었다.
늘 마음은 엄마에게 잘해드려야지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입가에서만 뱅뱅 맴도는 못나고 무뚝뚝한 딸이다. 그저 엄마가 그리운 날에는 말없이 도시락통을 꺼내 집에 있는 반찬을 소복이 담고 밥 위에 얹을 계란 프라이 하나만 뚝딱 만들어서 도시락을 싼다.
그동안 엄마에게 받기만 했던 사랑을 이제는 조금이라도 되돌려드리고 싶다. 엄마가 내 곁에 오랫동안 계시면서 우리 아이들처럼 사랑을 충분히 받으셨으면 좋겠다. 딸표 사랑 도시락을 드시고 엄마의 몸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살찌고 따뜻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