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별소녀 Oct 22. 2021

엄마에게 내 소중한 것을 내어드리기

태어나서부터 가게에 딸린 방에 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 밥상보다 손님에게 야채를 팔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더 익숙했다. "아줌마, 콩나물 500원어치만 주세요. 두부 한 모 주세요. 계란 얼마예요?" 하는 소리가 나에게는 모닝콜이었다. 콩나물 500원어치를 담아드리면 어떤 손님은 겨우 이만큼이냐며 더 달라고 실랑이가 오갔다. 더 담아주면 팔아도 남지를 않고, 더 안 주자니 손님이 기분이 언짢아지실 것 같고... 그렇다 보니 어린 시절 엄마는 늘 피곤해 보였다.


중학생 때는 아버지의 도박빚을 갚기 위해 엄마는 길거리나가 야채장사를 하셨다. 여름이 오면 아스팔트는 이글이글 불타올랐고 엄마는 그 맹렬한 열기를 손부채 하나에 의지해 이겨내 보려고 애쓰셨다. 반대로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이번엔 차디찬 추위가 엄마를 힘들게 했다. 아무리 양말을 껴신어도 옷을 겹겹이 껴입어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한기에 엄마의 발가락과 손가락, 뺨은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여름이면 땀띠로, 겨울이면 동상으로 고생하셨던 엄마가 일이 힘들 때마다 내게 말씀하셨다.


"정림아,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커서 엄마처럼 몸으로 먹고살지 말고 꼭 펜대 잡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한 사무실에서 네가 일했으면 좋겠어. 엄마는..."  


 "공부해!"라는 말보다 이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고생하시는 엄마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안겨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내 일은 알아서 묵묵히 하는 딸이 되어갔다.


엄마는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국민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만 겨우 다니셨다. 또래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서 뛰어놀고 공부할 나이에 엄마는 밭을 뛰어다니며 날아오는 새를 쫓는 일을 하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조금 더 커서는 자전거에 다는 바구니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고 10대 후반부터는 밤을 새워가며 양말공장에서 양말을 짰다. 아버지와 결혼을 한 후 양말 공장을 운영하다가 아버지의 도박빚으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외갓집 근처로 이사를 와서 태어난 지 겨우 6개월 된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긴 채 야채장사를 시작하셨다. 잠깐만 하고 말아야지 했던 장사가 그 후로 지금까지 40년째 이어지고 있다.    


엄마는 엄마의 교육 수준과 가난이 나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셨다.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던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좋은 공부방, 좋은 학원을 수소문해서 나를 가르치셨다. 엄마가 배추 한 포기, 두부 한 모, 콩나물 500원어치를 팔아서 번 돈으로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아노를 쳤고, 대학교를 졸업했고!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대학교 졸업식날. 학사모를 머리에 씌어드렸을 때. 엄마는 엄마의 평생소원이 이루어진 듯이 그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나는 엄마의 소원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은행에서 일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이 되었다.

 

8년 전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순간순간 엄마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자연분만으로 낳았을 때. 모유수유로 유두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통증이 있었을 때. 아이가 칭얼대서 포대기에 엎고 자장가를 부르고 재울 때.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 때. 아이들이 아파서 입원했을 때.

'우리 엄마도 이렇게 고생해서 날 낳고 길렀겠지? 이렇게 힘든 걸 어떻게 40년이 넘도록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남들처럼 엄마에게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딸 노릇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가 일을 쉬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엄마에게 드리기로 했다. 아이들이 기관에 가고 없는 아침. 내 시간을 내어드리기로 했다. 아침이면 엄마 집에 가서 같이 아침밥을 먹고, 다리가 불편한 엄마를 도와 아침에 가게문을 함께 열고 있다. 간단한 은행 업무조차 어려워하시는 엄마를 대신해서 통장정리, 입출금, 거래처에 돈을 송금해드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가끔씩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을 같이 먹으며 말동무, 밥친구가 되어드리고 있다. (솔직히 나도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없어서 엄마와 함께 먹고 있다.)


엄마에게 싸드린 도시락
가게에 밥이 없어 라면과 함께 먹은 반찬들.역시 라면은 진리!평소보다 더 맛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가 해 주신 밥과 반찬과 국을 먹고 무럭무럭 잘 컸듯이 엄마도 내가 싸드린 도시락을 드시고 몸과 마음이 살찌고 따뜻해지셨으면 좋겠다. 핸드폰 문자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서 보내고 싶지만 엄마가 전화를 걸고 받을 줄밖에 모르시기에 그건 어려울 것 같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주셨고, 가슴에 따뜻한 사랑을 심어주신 엄마.

앞으로 우리 아이들의 재롱도 많이 보시며 많이 웃으시고, 그동안 못해봤던 소소한 것들도 함께 해보며 좋은 추억 많이 쌓고, 남은 인생 행복하고 웃음 가득하시기를...


작가의 이전글 나의 결혼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