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위한 도시락

못난 딸이 만든 따뜻한 사랑의 도시락.

by 지구별소녀
딸표 사랑 도시락

엄마는 내 나이만큼 40년째 야채, 과일 장사를 하고 계신다. 가난한 집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4명이나 있어 10살 때부터 논밭에 날아오는 새를 쫓는 일을 하셨다. 우리 큰 아이가 올해 8살인데 엄마가 우리 아이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엄마는 아빠를 양말공장에서 일하다가 만나셨다. 아빠는 나에게는 다정하고 좋은 아빠였지만 엄마에게는 빵점 남편이었다. 잘 지내시다가도 무슨 주기가 있는지 잊을만하면 또 도박에 손을 데서 엄마가 안 쓰고 아끼고 힘들게 일해서 모아놓은 돈을 허공에 뿌리듯이 날리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빠의 빚을 갚기 위해 점점 더 억척스러워졌고 얼굴은 생기를 잃어갔으며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더 사라져만 갔다. 엄마가 가게에서 장사를 하셔서 늘 몸은 내 곁에 있었지만 힘들고 고된 장사로 인해 엄마는 어린 내가 묻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조차 많이 버거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곁에 있어도 늘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가 커가면서 점점 더 원망스러워졌다.


내가 중학생 때 엄마는 노점 장사를 해서 나를 뒷바라지하셨다. 사춘기가 한창일 때 친구와 길을 걷다가 길에서 장사를 하고 계시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차마 친구 앞에서 "우리 엄마야."라고 소개를 할 수 없었다. 나와 있을 때는 부끄럽지 않은 엄마였지만 친구의 엄마는 114에서 전화안내원으로 근무하신다는 얘기를 들은 직후여서인지 길에서 장사를 하는 엄마를 왠지 친구에게 소개해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며칠 후 오빠로부터 엄마가 그 일로 많이 속상해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나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기에 엄마에게 더욱 미안해서 엄마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학연수까지 다녀온 나는 엄마를 볼 때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내가 공부하느라 엄마 등골을 많이 빼먹어서 이제는 남아있는 등골도 얼마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고 내가 학사모를 쓸 때에도 어학연수 후에 한국에 귀국했을 때에도 나보다 더 기뻐했다.

대학교 졸업을 하고 통번역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의 빚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아직 25살이었고 시집을 갈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고 하면 행여나 자식에게 걸림돌이 될까 봐 끝까지 이혼만은 원치않으셨다. 하지만 날마다 불어나는 일수에 사채빚에 아버지로 인해 생긴 빚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혼 후 아버지의 모든 빚을 떠안은 엄마와 나는 단둘이 살게 되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사채업자에게 빚을 갚던 날.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수중에는 우유 하나를 사 먹을 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였지만 내 등 뒤에선 눈물을 많이 흘리시고 계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몸보다도 마음이 추워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파트의 보일러조차 마음대로 틀 수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서 집에서도 입김이 날 정도였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녹이려 애썼고 산처럼 쌓인 빚더미를 조금씩 조금씩 갚아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나를 때로는 남편처럼 때로는 아들처럼 딸처럼 친구처럼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셨다.

평생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내게 불현듯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2013년 11월에 결혼을 했다. 그 사이 토끼 같은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아이들에게 밤새워 젖을 먹이며 '엄마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키웠겠구나... 나를 위해 많은 걸 희생하시면서 엄마로서 그 긴 세월을 사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때마다 와락 눈물이 쏟아지면서 가슴이 시원해질 때까지 한참을 울곤 했다.


올해 큰 아이가 8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했고 작은 아이가 5살 정도 되자 몸과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래서 반찬을 하는 김에 양을 조금 더 넉넉하게 해서 엄마에게 가져다 드렸다.


엄마 가게에 들를 때마다 찬밥에 물을 말아서 김치 반찬에만 조촐히 밥을 드시는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마음속으로는 '도시락을 꾸준히 싸다 드려야지.' 하면서도 그게 마음만큼 쉽지 않았다. 내리사랑이어서인지 아이들이 어려서인지 늘 엄마보다는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못난 딸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내고자 어쩌면 내 마음이 조금 편하고자 도시락을 열심히 쌌다.


늘 김치에만 밥을 드시는 엄마에게 시판 도시락같이 단백질과 야채가 풍부한 도시락을 싸 드리고 싶었다. 오늘은 특별히 고등학생 때 친구들 반찬 중에 제일 부러웠던 비엔나소시지도 파프리카와 볶아서 싸 보았다. 칼슘 섭취를 위해 멸치 볶음도 싸고 아삭한 무말랭이도 곁들여 싸 보았다. 하지만 이미 어금니가 다 빠진 엄마는 딱딱한 반찬은 드실 수 없었다. 이제야 못난 딸이 도시락을 싸드리기 시작했는데 엄마는 정작 그 반찬을 잘 못 드실 정도로 연세가 드셨다고 생각하니 할 수만 있다면 인생시계를 앞으로 앞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신 밥과 반찬을 먹으며 쑥쑥 컸는데 이제는 내가 싼 도시락을 드시면서 엄마의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지고 몸이 조금 더 좋아지셨으면 좋겠다. 도시락을 싸면서 예전에 내가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친구들은 계란말이나 소시지. 진미채 볶음. 조미김과 같이 맛있는 반찬을 싸오는데 나는 왜 맨날 김치와 맛없는 나물반찬만 싸주냐며 투정을 자주 부리곤 했었다. 엄마는 그때도 장사를 하고 계셨으니 도시락을 매일같이 싸는 것도 많이 버거우셨을 텐데... 반찬투정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엄마는 나를 위해 그동안 몇 번이나 도시락을 싸셨을까? 어림 계산을 해봐도 중. 고등학교 때에만 약 1000번넘게 도시락을 싸셨을 것이다.


앞으로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기가 쑥스러울 때마다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 봐야겠다. 김이 솔솔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밥과 반찬에 내 마음이 오롯이 담겨 도시락을 드신 엄마의 몸과 마음에 내 사랑이 서서히 번져가기를...

지난 주말에 싼 딸 표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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