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즈데이
얼마 전 본 어떤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3배의 삶을 산다.'라는 의미의. 상당 부분 동의했다. 누구나 어떤 이야기에 몰입하면 그것을 따라 감정적 체험을 하게 된다. 공감하는 인물에게 나의 감정을 대입하기도 하고,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인물에 대해 나름의 이유를 상상하기도 한다. 창작자가 알려주는 비밀이나 이유에 무릎을 '탁' 치기도 하고, 이 무슨 쓰레기 같은 이야기냐며 그때까지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투자한 노력에 대한 배신감을 느껴 작품 자체를 저평가하기도 한다. 종종 의도를 직관적으로 알 수 없는 작품도 있다.
튜즈데이는 처음 겪는 영화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낯선 동물의 등장, 동화같이 자유로운 표현, 역시 동화처럼 잔인한 표현에 현혹되었다.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꽤 밝은 느낌의 에필로그에 또 그랬다. 제법 신선한 감흥을 안고 엔딩 크레딧이 끝난 상영관을 나오는데, 묘하게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이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개성적인 영화에 마냥 화사한 엔딩으로 진부하게 응원의 메시지만 담을 리가 없다. 차분하게 곱씹어본다. 아래는 이 우화에 대한 나의 해체다.
튜즈데이는 죽음을 연민한다. 죽음에게 공감한다. 죽음과 함께 노래하며, 죽음을 도와준다. 마침내 '죽음을 눈앞에 둔' 15세 소녀는, 누구보다 죽음과 가깝게 지내며 죽음을 이해한다. 조라는 죽음에 분노한다. 죽음을 쫓아내려 한다. 죽음을 속이고, 죽음을 죽인다. 자식의 생존과 자신의 의미를 동일시한 엄마는, 죽음과 함께 있는 딸의 전화는 무시하면서도 부모로서 책임을 다한다고 믿는다.
귓구멍에 죽음의 속삭임을 담고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이의 심정이 드러난다. 고통 없는 하루가 곧 행복인 이에게 매일의 고통은 곧 매일의 불행이다. 그 끝에 다다라 찾아온 죽음은 오히려 상상보다 미약하다. 준비한 죽음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바라는 하나는 그저 엄마에게 마지막 안부를 전하고 싶다. 오랜 세월 동안 삶이 무너지고 전 재산을 잃기 직전까지 내몰려 죽음이 지긋지긋한 이의 심정이 드러난다. 그냥 머릿속을 비우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자신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들키기 싫어 사랑하는 이를 회피하고, 진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반복하는 엄마는 그것이 딸에 대한 사랑이라 믿는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그것을 넘지 못하고 있던 이들에게 죽음을 실행하면서 점차 그들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 죽음에 대한 부정과 긍정은 혈연처럼 밀접한 관계이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해하기엔 너무 큰 개념이다.
이들에게 죽음이 요구하는 것은 그저 말하라는 것이다.
튜즈데이, 엄마에게 오늘 죽는다 말해.
조라, 튜즈데이에게 너의 죽음을 수용하겠다 말해.
연명치료고 신이고 사후세계고 이런저런 샛길로 도망치지 마.
서로 말해. 너의 마음이 어떤지.
나의 입으로 들으려 하지 마.
그저 날 받아들이고, 떠나는 이를 추억해.
매우 민감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는 귀하다.
이런 감독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욕하고 비난해도 좋으니 말해.
내 이야기를 들은 너의 마음이 어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