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
툭. 툭. 끊긴다. 이 신과 다음 신 사이, 감정의 연결이란 게 있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다른 영화가 나오더니 영화 속 영화고, 돌연 다큐처럼 3인칭 내레이터가 인물들을 해설한다. 어둠 속 작은 조명 아래 가족의 얼굴만 둥둥 떠 교차하는 장면은 여러 의미로 백미다. 이 정도면 몰입하지 말라고 따귀를 때리는 것 같다.
등장인물에게 공감하게 만들고, 그 인물을 폭발시키면 관객은 공감한 만큼 감응한다. 인과관계다. 일반적으로 대중성을 향하면 이 정석에 주력하고, 고유성을 향하면 여기서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려 한다.
센티멘탈 밸류는? 좀 많이 벗어난다. 아니,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
이런 편집 또한 과연 예술 욕심일까 싶다.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피로 유발과 몰입 방해일 뿐이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이 유지된다. 끝까지 화해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실 감정의 연결이 흐릿한 건 현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본 모두가 그렇듯, 나도 내 가족의 모습과 이어본다. 정확히는 '명절과 명절 사이' 같다.
가족이라고 마냥 화목하던가. '내가 한 번 참아야지!'하고 넘어가거나, 누군가 날 위해 참거나. 그러다 문득 대판 싸우고, 명절이든 경조사든 얼굴은 또 본다. 사이의 시간은 '잘 지내겠거니' 하는 거다.
이상한 편집이지만, 진정한 화해 없이 살아가고 있는, 혹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 가족의 질감 같다.
글쎄, 화해란 거. 꼭 해야 할까?
해묵을 대로 해묵어 쾨쾨하고 쿰쿰한 상처를 들춰낸 뒤, 뿌리의 흙을 곱게 털어내 탐구하고, 그것을 거쳐 방금 솟아난 새잎까지 살펴보고, 어떤 '정리'를 해내는 일. 이것을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객관화하고, 대화의 고저를 감당해야 하는 일.
상처의 깊이만큼 정력을 쏟아야 하는 작업.
구스타브는 창작으로 치유하는 사람이고, 노라는 배역으로 흉터를 덮어온 사람이다. 이들의 태도를 회피라 비하할 수 있을까. 나를 무너뜨릴 만큼 무거운 짐이라면, 지지 않는 게 답이다.
회피는 정답이 아니지만, 직면만이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때론 버티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일 수 있다.
구스타브는 화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노라의 위태한 파장을 감지했고, 그저 자신의 방법을 전달하고 싶었다. 문제는 소통이었다. 서로 통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일. 구스타브가 노라에게 던진 시나리오를 중반에 한 번 더 상기시킨다. 그리고, 결말의 원샷으로 거두어들인다.
이 엔딩은… 항복이다.
견뎌냈기에 도달한 종착에서, 노라와 구스타브는 주인공과 감독으로서 영화를 찍는다. 아버지는 컷을 외치고 말한다. "완벽해."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친다. 그동안의 매정한 편집은 온데간데없고, 원샷으로 이어진다. 2시간을 넘게 부지런히 끊어온 감정을 하나로 잇는다. 거절하던 몰입을 한 번에 퍼준다. 긴장은 멀어지고, 안도감이 느껴진다. 하… 이 정도면 예술이라고 하는 게 맞다. 의도가 느껴지고, 결국 당해버렸으니까.
이 가족이 화해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갈 함께 이해해 본 이 경험이 남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아마 영화는 대를 이어 머무는 '집'을 '센티멘탈 밸류'라 칭한 것 같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해 본다.
조금씩 태워 열량 삼을 수 있다면, 트라우마에 감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이 아니라 어떤 취미라도, 어떤 행위라도, 자신의 멍울을 옅게 하는 데 집중한다면야.
그렇게 지내다 보면 해빙의 순간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