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리고 둘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직접 눈으로 본 게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별 감흥도 없었다. '오랜만이네.' 정도의 생각. 태양으로부터 내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일시적으로 모여 있는 작은 수분 알갱이들에 부딪히며 무지개로 나타난다. 덕분에 난 그 빛 덩어리가 나눠진 모습을 잠시나마 볼 수 있다.
단순화하면 생은 탄생부터 죽음이라는 두 지점의 연결이다. 시작과 끝은 같지만, 같은 생은 없다.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에게 갇힌 채 서로 닿는 순간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흐름을 연속할 뿐이다. 이를 삶, 인생 등으로 부른다. 우리 중 누군가가 인생을 말하고 싶어 졌고, 그는 이 커다란 빛 덩어리를 영화라는 프리즘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보여준다.
임신부터 장례식까지, 탄생부터 죽음의 과정을 한 가족이 나누어 살아간다. 성별도 나이도 다르고 사회적인 역할도 다르다. 하지만 모두 각자의 고충을 겪고 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된다. 이를 바라보는 나는 누군가에게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공감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나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대입해 생각하게 된다.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주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공감과 공감하지 않음의 상반이 아닌 공감과 간접 공감 시도의 양분이다. 만약 한 인물의 인생을 조명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런 양분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인생을 각각의 인물로 나누었기에 격양된 공감보다는 객관화된 공감을 끌어낸다. 마치 나와 유사한 아픔을 겪는 친구에게 "많이 힘들겠구나. 그 마음 알아. 나도 그랬었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심정과 비슷하다. 격양된 공감은 인물과 나를 하나로 여긴다. 하지만 객관화된 공감은 인물이 된 나를 타인으로 여긴다.
그래서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쉬워진다.
감독의 생각이 응축된 사물인 '카메라'를 활용한 부분과 그 활용을 의도적으로 제한한 부분의 대비도 인상적인데, 위에서 말한 구조와 맞물려 더 큰 효과를 낸다. 한 시간대를 살아가는 가족을 공동체가 아닌 인물 단위로 나누어 보여주는 것은, 카메라를 활용해야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1인칭 시점을 배제한 것과 인물에게 다가가지 않는 쇼트는 카메라를 활용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부분이다. 전자를 통해 타인들이 내게 허락하지 않는 타인들의 나머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후자를 통해 이해와 공감에 대한 내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생 이야기를 접하면서 인생에서 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경험은 드물다.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
영화 같은 이야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우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잘 전달되기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