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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Apr 16. 2021

한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에 대해

파괴의 미학, ‘지붕뚫고 하이킥’의 결말

녹아 없어질 바엔, 사라지기를 돕는 편이 나았다.

'지붕뚫고 하이킥'을 무심결에 보기 시작한 건,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나서부터였다간만의 무료함이 이어지던 당시, 다들 뭐가 재미있다고들 호들갑인지 호기심에 들여다보기 시작한 게 그만 폐인이 되어버렸다. 만화적 상상력의 기발한 작법이 동원된 에피소드 하나를 보고는 별 근거도 없이 무작정 결론을 냈다. ‘희대의 걸작이다!!’라고… 그 후로 두 달 여가 지난 뒤 지난주에 마지막 회가 방송되었다. 그간 언론에 회자되었던 것처럼 마지막 회의 결말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캐릭터는 <프라하의 봄>의 테레사에게서 영향을 받았어요. 끊임없이 운명 같은 걸 믿는 부분이 닮았죠. 세경이가 신발 때문에 지훈이와 처음 만난 것도 지훈이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 세경이는 마지막까지 지훈과 처음과 끝을 함께 한다며 그를 운명처럼 생각하죠. 존재 자체를 무겁게 생각하는 아이를 그리고 싶었어요” _김병욱 PD

(분명히 엔딩도 프라하의 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척 유사하다.)


그 의도가 상업적이든, 작가주의적인 고집이든, 둘의 조합이든 간에 그 기이한 끝을 본 것으로 인해 아직도 알 수 없는 알싸함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찬반의 논란이 여전하지만 나는 이러한 결말을 지지한다.


통일성과 조화,  하나의 일관된 맥락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적절하게 유지되느냐는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중요하다. 환각을 경험한 환자가 기괴한 체험을 재현하여 그려낸 그림을 보면, ‘창조적인 측면에서는 무척 새롭긴 하지만 부분에로의 집착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유지하지 못해 결국 '기이한 경험’에서 멈추고 만다. (물론 천재들은 이를 극복해낸다. 쿠사마 아요이 같은 대가도 존재한다.) 호흡이 긴- 물론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긴 하지만- 126회차 드라마의 경우라면 전체적인 톤과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책임 PD 머릿속에서 매일 수많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사투를 벌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트콤에서 잔뼈가 굵은 김병욱 PD 마무리는 분명 일관성을 저버린 처사이다. 분열증적 결말이라고 해야 맞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주의로의 지나친 집착 수도 있다. ‘서울에  산골소녀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통한 희망 찾기’를 내건 시트콤에서 느닷없는 남녀 주인공의 동반 죽음이라니!


하루 만들어 하루 방송하는 열악한 제작 시스템에서 일관성의 잣대로 작품을 판단하기란 애초에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방영 중에 종종 김병욱 pd 스스로 “나무만 보고 숲을 걷다가 길을 잃곤 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마지막 결말에서 극의 전반적인 흐름과 시청자의 일반 정서를 포기하는 아쉬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만들어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의지를 끝끝내 실현했다. 애니메이션 ‘메트로폴리스’(역시 계급을 다룬다)에서 도시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엔딩을 맞이했던 것처럼 말이다. 피가소도 말했다.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 이 역시 창조적인 욕구이다".


어릴 적, 누구나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죽어라 만들고 난 뒤 문득, '앞으로 이 눈사람은 어떻게 될까? 언젠가 녹아 없어지겠지?' 라며 심각한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어차피 사라질 바엔 차라리 내 손으로 없애리라'하며, 눈사람을 다시 눈으로 회귀시키는 거친(?) 작업을 단행했다. 희한하게도 그 파괴의 순간 묘한 희열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이런 창조와 파괴의 순환은 블록 쌓기와 모래놀이 등 어린 시절 많은 놀이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파괴해야 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미련 없이 파괴하던 위대한 창조자들이, 어른이 되면 왜 그리 주저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2010년을 배경으로 부모 없는 어린 식모의 서울살이라는 모티브는 너무나 작위적이면서 노골적이었다.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기어코 다루고자 했던 계급의 문제에 대해 김병욱 pd 결국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야만 했고, 이는 애초에 행복한 화해로 슬쩍 도망갈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희망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사랑 만으로 모든 것이 연합할 수는 없는 안타까운 현실은 눈을 감아도 거기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어쩔  없음'이다. 지붕킥에 연호했던 가장  이유는 공허한 웃음의 판타지가 아니라 끝내 현실의 끈을 놓지 않았던  모진 강박 때문이다. 지훈과 세경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죽음으로) 모든  정지시켜버리는 , 드라마에서 가능한 낭만의 성취를 위한 마지막 시도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시작한 일을 종국에 마무리해야 하는 창조자의 고뇌 그리고 책임감을 이해할  있을  같다. 춘 3월에 하염없이 추적추적 내리던 눈처럼 당혹스러운 기분을 지울  없으면서도 말이다.


작가의 광포한 상상력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현상계를 넘나드는 놀라운 체험을 제공한다. 자신들의 세계에서 스스로 군림하려는 작가들의 모든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작품 속의 세계 역시 현실에서처럼 다수결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지루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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