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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로 Nov 14. 2020

눈 오던 날의 죽음

배우 이은주가 떠나던 날 , 그리고 故 박지선

© 2020 Roh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쯤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슈퍼에 다녀오던 내 여동생이 헐레벌떡 집에 들어오면서 외쳤다.
"밖에 사람이 떨어져 있어!"

무슨 일인가 싶어 부리나케 복도로 뛰어나갔다.
우리 집은 아파트에서 가장 높은 13층이었는데,

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하얀 눈 위에 모포에 덮인 사람이 누워있었고,
그 옆에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흐느끼는 듯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아래층에 살던 여고생이 투신자살을 했던 것이다.

하얀 눈 위에 놓여있던 한 여고생의 몸,
그것이 내가 죽은 사람을 실제로 본 첫 번째 경험이었다.


며칠 전에도 오랜만에 눈이 왔다.
지금은 마취과 인턴인지라, 수술실 있다가 커피 마시러 계단을 올라오려는데,    
계단 위 조그만 창밖으로 하얗게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다지 대수로울 것 없는 눈이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한참 동안 창밖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 보니 한 영화배우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더랜다.
내가 눈 내리는 풍경을 보았을 무렵,
그녀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왠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 소설 같은 데 보면, 눈 오는 날 동반 자살하는 연인들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그들의 사랑은 지고지순하고, 그들의 죽음은 낭만적으로 묘사된다.

눈으로 세상이 하얗게 덮여 가는 모습은,

죽음이라는 환상을 자극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욕망을 추동할지도 모른다.


눈은 참 독특하다.
그것은 차갑지만, 동시에 포근한 느낌을 준다.
(대개의 포근함은 따뜻하기 마련임에도)
어찌 보면 그것은 죽음과 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지 모른다.  
무섭고 두렵지만, 잠자듯 평안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눈을 보면서 죽음을 떠올리는 건, 그리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다.
얼핏 포근할 것 같은 눈도,
얼음 같은 차가움으로 변하여

동상에 걸리도록 할  수 있는 것처럼,
저너머 막연해 보이는 죽음도,

극한의 고통을 경유해야 하며,

그 끝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영원히 산다면 삶이란 덧없고 부조리한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죽음은 삶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창조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생의 포기를 위한 죽음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니다.

삶마저도 빛바랜 것으로 만들 뿐이다.


눈을 보면서 죽음을 떠올리기보다는,
눈처럼 스러져 없어지는 이 짧은 생의 소중함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눈보다 반짝이는 것을 더 많이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지난주, 뉴스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인턴 때, 故 이은주 배우 소식을 듣고 썼던 글이 생각나서 이렇게 올려본다.

안타까운 마음의 발로였지만, 역시 젊은 시절 과잉된 감상주의의 냄새가 짙다.

고인이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불신앙의 결과가 아니라 '질병사'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던 기억도 난다.


故 박지선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tv에서 비치기로는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배려심이 많아 보였다.

이번 일에 어머니와 함께였다고 하니 충격이 컸다.


이런 소식은 직업의 특성상 낯설지 않다.

사망사고의 유가족들, 특히 자살한 이들의 가족들을 치료하는 일도 종종 있다.

분명한 것은 자살에 대해 ‘오죽했으면...’하고 쉽게 동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언젠가 유가족 중 한 분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면담이 끝나고 방을 나서려다가 돌아서며 말했다.

(대개 이때, 의미 있는 말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서 절대로 경험해서는 안 되는 일 하나가 있다면, 가족의 자살입니다."

사고 이후 지내온 그분들의 삶을 떠올리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죽음보다는 삶, 망자보다는 남아있는 이들에 더 관심이 간다.

부재로부터의 공허감, 덧없는 후회, 불필요한 죄책감은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그들 마음속에서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경험해서는 안 되는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늘어나서는 안된다.

올해도 이미 충분히 경험했듯이.

누가 자살을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특히 동반 자살은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하지만, 서구 문화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절대로 익숙해지거나, 굳은살이 배겨서는 안 될 일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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