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기
체팔루에서 그리스유적이 있는 아그리젠토로 가는 날이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다. 아그리젠토에서 하룻밤을 묵고 카타니아로 돌아가면 내 여행은 끝이 난다.
팔레르모로 다시 돌아가 아그리젠토로 갈 생각이었다.
전날 미리 버스 시간을 확인한 후 아침 7시 버스를 타기 위해 6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버스가 오지 않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마침 나와 있던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오늘이 이탈리아 국경일 이어서 버스와 기차 편성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0시 10분에 팔레르모 가는 기차가 있으니 세 시간 후에 다시 오란다.
다행히 문 연 카페가 있었다. 크로와상과 카푸치노를 시켜 놓고 두 시간을 버텼다.
가방을 맡기고 잠시 산책을 하는데 무슨 날은 무슨 날인 것 같았다.
정장을 입은 남녀밴드가 연주를 하며 마을을 행진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팔레르모에 도착한 후 한 시간을 또 기다려 아그리젠토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2시에 도착했다. 7시간 만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목적지에 잘 왔으면 그만이다.
신전까지 가는 버스도 운행을 안 한다고 해서 한 시간을 걸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영업 중이라는 구글의 정보를 믿었지만 구글 정보도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다시 터덜터덜 걸어 시내로 돌아왔다.
중심가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무슨 행진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하루 내내 허탕만 친 기분이라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모마리아상을 실은 커다란 나무 가마를 수레에 실어 놓은 옆으로 제복을 입은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밴드가 연주준비를 하고 있었다.
12월 8일은 성모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을 축하하는 날로 가톨릭국가들은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해 축하한다는 내용을 검색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성모마리아수태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천주교신자가 아닌 나는 이 기념일이 생소한데 외국인이 한국에 온 날이 석가탄신일인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내 관심은 기념일의 내용보다 밴드에 있었다.
분명 동네 사람들로 이루어졌을 밴드에는 학생부터 여자 남자, 나이 지긋한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있었다.
이 작은 도시에 이런 행사가 가져다주는 흥분과 즐거움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연주가 합이 잘 맞고 흥겨워 연주나 들을 겸 행진하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성모상을 실은 가마는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걸 싣고 마을 꼭대기에 있는 대성당까지 갈 모양이었다.
아그리젠토도 산에 만들어진 도시라 계속 오르막길로 가야 했는데 중간에 계단을 만나면 남자들이 가마를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올랐다.
보기만 해도 힘이 들 지경이었으니 가마를 끌고 밀고 짊어져야 했을 남자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밴드는 계속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꽃다발을 성모상옆에 쌓으며 뒤따르는 사이 성모상을 실은 가마가 드디어 성당 안으로 들어와 맨 앞에 놓였다.
그리고 기념일 미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한 번도 미사를 참여해 본 적이 없다.
천주교신자도 아니고 이태리어도 모르고 미사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성당에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와 미사곡이 아름다워 그냥 있기로 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미사에 동참하게 되었다.
천주교의 미사의식은 아직까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성함이 남아 있다.
미사곡은 아름답고 의식은 경건하고 미사를 진행하는 목소리는 노래처럼 리듬이 있고 부드러웠다.
경박해진 찬송가와 시장통이 되어 버린 예배의식에 고개를 돌린 지 오래인데 아주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으로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의 미사가 아주 좋았다.
내일은 신전의 계곡을 보고 오후 버스로 카타니아에 간다.
더 이상의 별일이 없어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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