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기억의 저장고

-장소는 기억이다 노호리 카페 노호

by 도시소묘

여름은 깊어 간다.


우리는 연신 그늘을 찾아 떠난다.

손바닥만 한 그늘이라도 보일라치면 얼른 그 속에 몸을 감춘다. 작고 여린 어둠 속에 나를 감추고 휴우 한숨을 몰아쉰다. 아장아장 걷던 아가가 엄마 품에 안겨 작은 숨을 고르는 그늘. 그 그늘이라는 공간을 찾아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는 비포장도로와 시멘트 공장을 바로 옆에 두고 있다. 빛바랜 시멘트 공장의 외벽이 공간에 세월을 더한다. 삐걱거리는 비포장도로, 낡은 무게감을 지닌 커다란 시멘트 공장은 카페가 함께하는 공간이다. 뜨거운 햇살에 색을 잃어버린 이 낡은 공간에 흰색 외벽을 두른 기다란 모양의 카페가 보인다.


건물의 입구를 가린 가림벽을 돌아 카페에 들어선다. 낡은 공간들을 지나 마주한 풍경은 의외로 너무 신선해 낯설다.

첫 번째 만나는 풍경은 호텔의 로비를 연상하게 하는 입구였고, 두 번째 풍경은 커다란 통창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이며 더 깊숙이는 시냇물이 흐르는 외부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새로움의 깊이를 더하는 구조다. 내부 테이블은 시냇물의 흐름과 방향과 따라 강을 바라볼 수 있게 자유곡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우리도 자연스레 그 곡선에 몸을 맡겨 시내처럼 흐르게 된다. 작은 시내는 사실 충청 지역의 식수원인 금강의 지류다. 이 시냇물은 따라가 보면 갈대밭이 보이고 기찻길이 연결되는 그런 곳이다. 특히 비가 오는 때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 좋다.


문득, 여름의 냇가를 떠올린다.


방학이면 온 가족이 함께 떠나던 유년의 기억이다. 거대한 배낭을 맨 채 뜨거운 햇살에도 굴하지 않고 걷고 또 걷던 켜켜이 쌓인 그런 날의 기억들. 그런 후 강가에 텐트를 펼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한바탕 물놀이하고, 밥을 짓고, 밤이면 별빛을 세던 일들. 비가 내린 어느 날에는 세찬 빗줄기를 맞으며 작은 삽으로 텐트 밖에 물길을 내던 추억을 소환하는 곳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장소를 만난다.

어떤 곳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잊히고, 또 어떤 곳은 굳이 애써 붙잡지 않아도 삶의 지문처럼 깊이 각인되어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특히,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된 카페는 아릿하고도 아늑한 기억의 저장고가 된다. 흐르는 물소리와 커피 향 감도는 그곳에서 저마다의 소박한 이야기를 지어 올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쉬이 바래지 않는 선명한 기억으로 재생된다.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에 부서지는 냇물, 물가에 흔들리던 버드나무, 물가를 향해 어설프게 걷는 아이의 뒷모습, 그리고 마주 앉아 속삭이던 이의 얼굴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라떼 향이 냇물 소리에 섞여 가슴 저리던 풋풋한 설렘이 되살아 날것이다.


카페는 오감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그 기억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쉽사리 흐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오래된 타임캡슐을 열어보듯 과거의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경험은 카페라는 장소가 지닌 강력한 기억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다. 결국, 장소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간은 응축된 기억의 저장고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하는 따스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지만, 동시에 아련한 과거의 나와 연결되고 동시에 아득한 미래를 꿈꾸어 소중한 기억을 생성하고, 보듬어 간직하며, 때로는 꺼내어 다시금 살아 숨 쉬게 하는 존재다.


낡은 시멘트 공장, 쿵쾅거리는 비포장도로, 헝클어진 시냇가는 단단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카페 공간에 ‘결함’을 추가한다. 누구에게나 완벽한 맛을 선사하는 인공감미료를 빼고 그 허전한 공간에 자신의 맛으로 채울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로 공간은 완벽해진다.


그것은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을 감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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