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리티가 빚어낸 이상향의 풍경 테라로사 강릉
카페와 나의 거리 282km.
바다를 외면한 채 묵묵히 산으로 향한다.
한 치의 구김살도 없는 여름 하늘,
어디로든 도망칠 것만 같은 명랑한 햇살,
굽이치는 여름 나무의 바다를 헤치며 차를 달린 지 약 4시간 만에 카페에 도착했다.
내가 카페를 찾는 이유는 늘 한결같다.
그저 맛있는 커피를 만나려는 게 아니다.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나거나,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거나, 혹은 낯선 곳에서 잠시 숨 고를 장소를 찾는 것. 그리고 맛있는 커피. 그런 상상을 품은 채 강릉 테라로사로 향했다.
카페는 생각보다 깊은 산 속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카페에 발을 들이는 순간 커피보다 진한 숲의 냄새가 났다.
짙고 차분한 색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공간은 꽤 큰 창고를 연상시켰다. 투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웅장한 붉은 벽돌 건물 안, 거대한 로스팅 기계들, 무심한 듯 높이 쌓여있는 원두 자루,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운동기구와 녹슨 제본 도구들이 사람들의 북적거림과 뒤섞여 외부와 다른 서정적 감성이 느껴진다.
누구라도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면 시간의 파노라마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에는 커다랗게 바리스타들의 공간이 있어 어느 방향에서고 그들의 작업을 관찰할 수 있다. 원래의 용도와는 다른 쓰임새로 설정된, 오래된 가구들이 놓여 있고, 적어도 50년 전 방식으로 만들어진 미닫이 창문이 있다. 마당에는 오래 묵어 밑동이 굵어진 수국이 여름 볕 아래 지천으로 피어 있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원의 작은 연못을 바라보며 소박한 다리를 건너다보면 한가로이 떠다니는 오리와 닭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의 모든 구성 요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 정도면 도심을 떠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상상 속 풍경이 아닐까. 숲속 카페는 이제 향미가 더 진해지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안식을 취하고, 세상이 아름다운 여름의 노래를 연주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우리도 그 품에서 저절로 느긋해진다.
인본주의 지리학의 창시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그의 저서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에서
'공간(space)'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것이라면, '장소(place)'는 공간에 사람의 온기와 의미가 스며든 구체적인 곳이라 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곳은 커피의 본질, 공간의 미학, 그리고 강릉이라는 로컬리티(locality)를 뒤섞어 이상향을 만들어내는 화가의 '작업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카페 테라로사 강릉점은 시간의 흔적을 담은 공간, 멈춤의 미학을 세밀한 스케치로 보여 주고 있다.
이-푸 투안은 장소가 곧 정체성을 만든다고 했다. 단순한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강릉은 동해안에 위치한 한 도시일 뿐이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방문객들의 경험, 감정, 그리고 축적된 시간은 강릉을 특별한 ‘장소’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테라로사는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테라로사는 단순히 강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릉의 자연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려 그 자체로 강릉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테라로사의 커피와 공간을 통해 강릉이라는 도시의 정취를 온몸으로 느낀다. 단순한 관광이 아닌 지역 고유의 색깔을 경험하고, 스케치하는 여정에 동참하는 공동 작업의 과정이다.
한잔의 커피는 그 공간에서 경험한 모든 감각과 감정이 농축된, 하나의 '기억'이 된다.
이-푸 투안의 말처럼, 장소는 친밀함과 애착의 중심이 되기에 강릉을 떠올릴 때면 커피 맛과 함께 숲의 고요함,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견고한 감정들을 함께 기억할 것이다. 테라로사는 그렇게 강릉 한구석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선명한 그림으로 남아 자연주의 화가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풍경화처럼 아늑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충분히 감상한 후 나는 수묵화처럼 번져 그곳에 스며들고, 마음 한구석을 떼어놓은 채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