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 있는 카페_부산 모모스커피 본점
부산 모모스 커피 본점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좁은 길로 접어들며 '여기가 맞나?' 의심하는 사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단 들어선 후 '이게 대체 뭔가?'하고 잠시 멈춰 서는 사람. 나는 후자에 속했다. 도심의 소음과 속도에 익숙해진 나에게, 모모스의 정원은 그렇게 멈춤이라는 신선한 당혹감을 선사한다.
지하철 옆 비좁은 골목을 돌아 카페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높다랗게 무리 지어 자란 대나무를 만난다. 그 틈 사이에는 동물 모양의 거대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다. 카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에 다시 한번 발걸음을 멈춘다. 마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처럼 나를 잃고서 행방불명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속 깊은 공간이다.
도시는 숨 막히게 복잡하고 소란하다. 온갖 소리와 속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으로. 세상의 소음을 잠시 멈추고 '내 속의 고요'를 듣게 해주는 장소를 찾게 된다. 그런 면에서 모모스 커피는 단순한 카페라기보다, 도시의 소란스러움 속으로 덜컥 걸어 들어온 '작은 정원'이다.
화려함으로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대신 세월이 깃든 나무들과 시간을 잊게 해주는 석상들, 넉넉한 그늘, 그리고 잘 다듬으려 애쓰지 않은 자연스러운 흙의 질감. 이 공간은 흡사 시간이 멈춘 정원처럼 느껴진다. 삶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정서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고요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하는 쉼이란, 단순한 안락함이 아닌 세월의 무게와 속도를 잊게 해주는 정지가 아닐까.
그런데 그 완벽한 정지 속에서, 아주 비현실적인 것이 흐르고 있다. 바로 작은 개울이다. 도심의 아스팔트와 자동차 소리 속에서, 물이 돌과 이끼 사이를 부지런히 '졸졸' 따라 흐르는 소리는 거의 환청에 가깝다. 이 작은 개울은 모모스 정원의 가장 큰 아이러니다.
김훈 작가라면 이 물소리를 두고 '삶의 멈출 수 없는 유배'라고 표현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었던 세월을 살아왔다.
책임감이라는 거대한 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밀려왔다.
모모스의 개울은 바로 그 멈출 수 없음을 상징한다. 정원의 나무와 돌들은 고요히 서 있지만, 물은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흘러간다. 이 정지된 정원의 영원한 흐름을 바라보는 일은 명상이 된다.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도시의 소음은 얇은 막처럼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비로소 내 안의 고요가 반향을 일으킨다. 세월의 눈에는 저 작은 물줄기가 때로는 지나간 세월의 강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기억의 편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정지된 정원에서 강렬한 각성제를 주문한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강렬하게 응축된 에스프레소야말로 이 공간의 영혼과 가장 잘 맞닿아 있다.
작은 데미타세 잔에 담긴 진한 액체를 들이켜면, 혀는 쓴맛과 산미, 그리고 숨겨진 단맛으로 격렬하게 깨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고요의 근원으로 끌어당긴다.
우리는 여전히 사회와 가정에서 강력한 각성을 요구받는다. 일해야 하고, 돌봐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위안과 평화를 갈망한다. 이 두 상반된 요구를 단 한 잔의 에스프레소와 한 줄기의 개울 소리에 의지한다. 강렬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이켜, 혀끝에 남은 쓴맛과 동시에 개울의 청량한 물소리를 듣는 것. 이것이 바로 모모스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고요한 역설이다.
가장 빠르고 강렬한 커피와 가장 느리고 잔잔한 자연의 그리고 도시의 조화라니 말이다.
그러나 정원에서 우리는 가장 솔직해진다. 세월의 눈에는 햇살이 나뭇잎을 뚫고 돌 위에 떨어지는 그 '빛의 조각'이, 젊은 날 놓쳤던 수많은 인생의 기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시 눈을 감고 물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작은 정원에서 일생을 보낸 화가 모리카즈처럼 '내 삶의 5평짜리 정원'을 마음속에 다시 짓고 돌아가는 것이다.
모모스의 정원은 부산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무심함 속에서,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방식으로 성숙한 영혼을 위한 위안을 제공한다. 이곳을 나서는 이들의 발걸음은, 잠시나마 멈춤과 흐름의 균형을 되찾은 듯 가볍고 단단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 정원의 고요가 영원할 수 없음을. 하지만 그 짧은 고요 속에서 얻은 삶의 본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 싸울 힘이 된다는 것을.
그것이 가장 실용적이고도 철학적인 휴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