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섬들의 시

-광주 카페 손탁앤하이어.

by 도시소묘
양림동 골목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통로다.

붉은 벽돌의 옛 건물들과 선교사들이 머물던 집들이 자아내는 묘한 이국적 정취는 이곳을 비밀스러운 기억의 창고로 만든다. 시간의 켜가 겹겹이 쌓인 골목 끝에서 만나는 북카페 ‘손탁앤하이어’는 문 앞에 적힌 ‘No Study, No Kids’라는 단호한 문구로 손님을 맞이한다.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밀어냄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오직 온전한 몰입과 조용한 숨어들기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으로 읽힌다.

No Study
No Kids

문을 열고, 나의 생각과 취향을 확인하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게임에 접속한다. 공간은 온통 느린 다정함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손때 묻은 아날로그의 문법을 따르는 이곳에서, 디지털의 매끈한 속도는 힘을 잃는다. 지직거리는 LP 바늘의 마찰음, 지난날 아티스트들의 CD, 삼면을 에워싼 종이책들은 이 집만이 가진 사랑스러운 불편함이다. 덕분에 비로소 섬세함을 갖추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얻는다.

서두르지 않는 손길을 지켜보고 있으면,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오기까지 필요한 기다림조차 이 공간이 주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묵직한 첫맛 뒤로 은은한 과일 맛이 혀끝을 스치고, 삼킨 뒤에도 코끝에 남는 잔향은 공간의 분위기만큼이나 단정하다.


공간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대형 테이블에 놓인 서점공간이다. 서가에 놓인 책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의 조각이다. ‘무언가 주고 싶다’는 마음과 ‘무언가 갖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 ‘헤아려지고 싶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느낀다. 책장의 결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왜 하나같이 이렇게 닮아 있는지 깨닫게 된다.


수전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를 골랐다.

손탁에서 산 손탁의 책이다.

손탁이 이 북카페의 주인이라면, 그래서 오늘 그를 만난다면 어땠을까? 하는 묘한 상상도 해본다. 타임슬립 소재를 매우 좋아한다. 시간을 거슬러 작가와 마주 앉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수전 손택이 직접 판 위에 바늘을 올리고 정성껏 내린 커피를 건네주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카페의 이름과도 닿아 있는 작가의 이름을 매만지며 책장을 넘긴다. "여성들은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자신들이 느끼는 바를 스스로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고 외치는 손택의 문장은, 꾸며진 젊음보다 정직한 세월의 결을 선택한 이 공간의 나무 가구들과 닮아있다. 사회가 정한 잣대나 나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를 해방시키라는 조언은 선명한 울림을 준다.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면의 진실을 대면하라는 말일까.

완벽하게 숨어들 수 있는 1인 고객용 독서 공간이 2층에 마련되어 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1인 고객을 위한 독서 공간이 있다. 낮은 빛의 조명이 꼭 필요한 만큼만 책상을 비추고, 의자는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로 놓여 있다. 해 질 녘, 서양식 옛 건물들 사이로 노을빛이 천장을 타고 길게 들어올 때 이곳의 밝기는 비현실적인 평온을 선사한다. 고요는 더욱 단단해진다.

저마다의 섬에 정박한 채 홀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은 흡사 조용한 기도문을 외는 수행자들과 닮았다. 어떤 이는 낡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문장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고, 어떤 이는 턱을 괸 채 창밖의 빛이 책장 위로 옮겨가는 궤적을 멍하니 지켜본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는 카페의 음악 소리와 섞여 기분 좋은 떨림을 만들어낸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을 공유한다. 타인과 연결되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이 적절한 거리감이 주는 안도감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가장 솔직한 자신과 마주한다. 책장을 덮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볼 때, 그 눈빛에는 방금 읽은 문장이 남긴 긴 여운이 서려 있다.


헤아려지고 싶었던 마음이 책 속의 글귀를 통해 위로받는 순간이다.

음악은 공간의 온도를 결정하는 심장 박동이다. LP로 플레이되는 음악은 매끈한 기계음에서 느낄 수 없는 손에 잡힐 듯한 촉감을 지니고 있어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음악이 바뀌는 찰나의 정적, 바늘이 다시 판 위에 내려앉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안을 스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사랑하겠노라 다짐한다.

겨울날이면 녹은 눈이 뚝뚝 떨어져 젖더라도 밖에서 마시는 커피를 고집하곤 한다. 차가운 바깥공기와 만나는 순간 맛은 날카롭게 살아나고, 목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커피 향을 뻥 뚫린 코로 온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 “찬 바람 좀 쐬고 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겨울의 서늘함은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을 명료하게 정리해 준다. 한겨울의 냉기 속에서도 식지 않는 내면의 온기라는 것을 이 시원한 호흡을 통해 배운다.


양림동의 역사적 무게감과 카페 손탁앤하이어의 아날로그 감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작게 헤아리게 된다.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이 공간은 다시 소란스러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나에게 가장 단순한 쉼을 건넨다.


새로 산 책을 소중히 챙겨 들고 마음속 겨울의 흔적을 털어내며 일어선다.

내 안의 정원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가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