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2
여자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내팽개쳐진 채, 정신없이 돌아가는 구급차의 빨간 경광등을 멍하니 쳐다봤다. 형편없이 널브러진 케이크를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손끝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여자의 심장박동은 무언가에 무겁게 짓눌려 점점 느려져 가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희미한 말들 사이로 선명하게 피어올라오는 음악 소리. 여자가 그토록 좋아했던 'Hisaishi Joe - 인생의 회전목마'였다.
여자는 어딘지 모를 광활한 어둠을 걷고 또 걸었다. 여자는 빛도 목적도 없는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걸을수록 기억과 감각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듯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걸으며 의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태엽이 어긋난 것처럼 반복되는 오르골 소리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08:00 pm]
똑딱거리는 시계소리가 어둠을 찢어내듯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여자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곳은 낡고 오래된 한 빌라 앞이었다. 빌라 앞은 철골과 녹슨 휀스로 둘러싸여 마치 거대한 무덤이 그곳의 온기를 모두 삼켜버린 듯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던 통증은 온데간데 없고 어쩐지 가벼워진 공허함이 느껴졌다.
여자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느껴 관자놀이를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듯한 거리는 활기를 잃은 채 모든 색이 한 단계 바래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머릿속에 스칠 것 같으면서도 흐릿하고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은 이승에 남은 미련, 그것을 품은 채 길을 건널 순 없습니다."
"여기는 어딘가요?"
"이곳은 당신의 집착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눈빛에서 무엇이라도 읽어보려 애썼지만 알아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그저 여자의 앞에 서서 그녀의 목에 감긴 잘 짜여진 빨간 목도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의 몸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저절로 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왠지...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 "
"당신은 누구인가요?"
" ... "
남자는 여자의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마치 중요한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자는 뱉은 말과는 다르게 계속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남자의 뒷모습에는 온기가 없었고 그는 마치 정해진 시각이 있는 듯 가슴 안쪽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08:30 pm]
남자는 한참을 걷다 이윽고 한 케이크 가게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뒤따르던 여자도 같이 멈춰 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미하지만 반짝거릴 것 같은 전구가 달린 큰 트리가 서 있었고, 주변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자는 갑자기 왜인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묵했던 남자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이곳이 당신의 마지막 장소입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이곳에 내려놓으세요."
여자는 울렁거리는 속을 어찌할 방법이 없어 견디기 힘들었지만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내려놓을 물건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여자는 신발도 없이 도로 위에 서있었고 주머니엔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갑자기 뇌리에 작게 떠오르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오르골 소리였다.
- 정말 금방 돌아올게. 그래도 내가 생각날 때는 오르골 태엽을 감아.
부른 여자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춘 이가 있었다. 그녀의 몇 남지 않은 기억 속 애틋하고 아련한 감정이 묻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오르골은 여자가 좋아하는 곡을 천천히 끝까지 들을 수 있게 남자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직접 만들어준 오르골이었다. 여자는 그 조금의 기억을 더 오래 느끼고 싶어 자신의 배를 감싸며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불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반짝이는 거리 사이, 빛을 빼앗긴 골목 안쪽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가로등이 깜빡거리며 오래된 빌라를 비추고 있었다.
-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아들! 미안해... 엄마가 일이 너무 늦게 끝났지.
- 엄마, 엄마. 케이크 사 왔어?
- 아... 미안해. 엄마가 얼른 온다고 깜빡 잊었어.
- 그럼... 우리 오늘 케이크 못 하겠네...
아이의 손에는 어린이집에서 선물로 받은 로봇이 들려있었다. 아이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여자의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이 보고 싶었던 여자는 자세를 낮춰 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 아니야. 한 번뿐인 우리 아들 생일인데... 엄마가 사 올 거야. 정말 금방 돌아올게.
- 나 혼자 있기 무서운데...
- 집 앞 골목으로 나가면 도로에 바로 케이크 가게가 있어. 엄마 정말 금방 와. 오르골이 3번 끝나기 전에 돌아올게
여자는 자신의 침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오르골 하나를 들고 와 아이에게 쥐어주었다. 차근히 태엽을 돌리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내려놓았던 빨간 목도리를 두른 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속 계속 쓰다듬었다. 마지막 장면이 반복되며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여자는 무엇인가 찌릿한 것이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그 통증에 여자는 눈을 떴고 그녀의 몸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 채 정신없이 돌아가는 빨간 경광등을 떠올렸다.
[09:30 pm]
" ... "
남자는 누워있는 여자를 여전히 메마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기다림이었는지 차가운 한숨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발을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불편함을 느낀 여자는 자신의 목에 둘러진 빨간 목도리를 천천히 풀어 남자의 목에 감아주며 말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저에게 없는 듯하네요."
" ... "
"이제 이것도 필요 없을 것 같고요."
" ... "
"대신 이것으로 당신이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요... 메리크리스마스."
" ... "
남자는 말없이 차가운 손으로 목도리의 끝을 매만졌다. 여자는 애써 미소지으며 남자의 눈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목도리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가슴 안쪽에 있는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한번 확인한 뒤, 여자에게 말을 꺼냈다.
[09:50 pm]
"의도하진 않았지만... 선물을 받았으니 저도 선물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자는 여전히 차가운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작지만 온기가 실려있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남자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시계탑의 종이 울릴 때까지 저곳에서 서 계세요. 그것이 저의 선물입니다."
캐럴이 뒤섞인 겨울 거리, 장난감 가게 유리창엔 김이 서려 있었다. 그 앞에,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커다란 눈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여자가 눈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대자 흐릿했던 거리의 빛은 점점 선명해지고 여자의 몸은 고운 눈발 사이로 흩어지며 눈사람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오르골 소리. 여자가 가장 좋아하던 '인생의 회전목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