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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이 뒤섞인 겨울 거리, 장난감 가게 유리창엔 김이 서려 있었다. 그 앞에,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커다란 눈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눈사람을 스쳐 지나갔고, 신나게 발길질을 하는 아이들만이 그 곁을 맴돌았다.
북적이던 거리에는 달이 떠오르고 달빛 아래는 이내 연인들의 온기로 가득 찼다. 온기 속 눈사람은 떠나가야 할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건너편 시계탑의 시간을 수시로 체크해야 했다.
[10:00 pm]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오르골 소리. 눈사람이 가장 좋아하던 '인생의 회전목마'였다. 몇 분이 흘렀을까, 오르골 소리는 멈췄다가 다시 반복되었다. 자꾸만 반복되는 오르골 소리. 좋아하던 음악에도 이골이 날 즈음, 눈사람은 말을 했다.
"꼬마야 안녕?"
눈사람 옆에 쭈그려 앉아 계속 태엽을 감던 작은 남자아이는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더니 옆에 있던 커다란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나야. 내가 말하는 것 맞아. 꼬마는 어째서 자꾸만 오르골 태엽을 감고 있는 거야?"
잠시 놀란 듯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쭈그려 앉아 오르골만 바라보며 태엽을 감는 아이.
"엄마가 올까 봐... 엄마가 오르골이 끝나기 전에 온대. 근데 있잖아, 지금은 그냥... 안 왔으면 좋겠어."
작은 아이는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다시 오르골 태엽을 감는 것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큰 눈사람은 어둠이 깔린 이 거리에 작은 아이가 나와 있는 것이 조금 걱정이 되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밤이 너무 늦었잖아."
"나는 오늘 보육원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크리스마스에 나쁜꿈을 꾸었거든. 오늘은 이곳에서 꼭 밤을 세고야 말 거야. 너도 내 옆에 있으니까 나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떤 꿈을 꾸는데?"
"...... 크리스마스가 자꾸만 반복 돼."
"크리스마스 라면....."
"크리스마스날 말야. 엄마가 잠깐 케이크를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어... 오르골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그날 집에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서워서 오르골을 100번도 더 감았는데..."
아이는 차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밤새 문을 두드렸고 전화벨도 계속 울렸어. 그렇게 며칠 동안 집에 혼자 숨어 있다가 보육원에 오게 된거야. 그 때의 꿈을 꾸는 게 너무 너무 무서워. 크리스마스 같은 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엄마가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날 여기에 혼자 있게 했잖아..."
"엄마가 널 버린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이제 상관없어. 그냥 그 꿈만 안 꾸면 돼. 그나저나 너는 왜 이렇게 못생겨진 거야?"
그 말은 날카롭게 눈사람의 심장에 박혔다. 눈사람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의 붉게 상기된 볼만을 바라보았다. 작은 아이와 대화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는 것을 잊고 있던 눈사람은 다시 한번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오르골 소리를 들은 지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니. 하지만 눈사람은 작은 아이가 곁에 있어 좋았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1:00 pm]
"아까 아이들이 나와 장난치고 싶었는지 자꾸만 발로 차서 여기저기가 좀 못생겨지긴 했지.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나는 서서히 녹아서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럼 꼬마는 언제 집에 들어갈 거야?"
"나도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보육원으로 돌아갈 거야.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에 잠이 들면 그 꿈을 안 꾸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때까지 내가 함께 있어줄게."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눈사람에게 큰 기쁨이었다. 둘은 서서히 가까워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깔깔거리며 웃게되는 이야기부터 가슴시리게 아팠던 이야기까지. 규칙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와중에도 아이는 오르골의 태엽을 감는 것을 잊지 않았다.
[11:30 pm]
즐거운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지 아이를 만나기 전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만 같았다. 커다랗던 눈사람은 이제 아이만큼 작아졌고 아이는 그것을 눈치챈듯 했다. 이때 눈사람의 눈이 조금 녹아내리며 작은 눈덩이가 아이의 손등에 떨어졌다. 잠시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자신의 목에 감고 있던 잘 짜여진 붉은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에게 감아 주었다.
"차갑네… 많이 춥겠다. 이거 내 목도린데, 너에게 줄게."
"고마워. 정말 다정한 꼬마구나. 네가 나에게 선물을 줬으니까 나도 선물을 하나 줄게. 더 이상 크리스마스날 나쁜 꿈은 꾸지 않게 될 거야. 약속할게."
"정말... 그렇게 될까?"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아이와 눈사람. 점점 피곤함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이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번득 정신을 차린 듯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사실 나 아까 거짓말한 게 있는데... 네가 떠나기 전에 말하고 싶어. 있잖아 나... 사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말을 잇지 못했고 잠들기 전 힘겹게 감았던 오르골의 태엽이 풀리며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계탑의 시곗바늘은 11시 50분을 가리키고, 눈사람의 눈,코,입은 흘러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눈사람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그저, 목도리가 얹어진 덩어리가 되었다.
이내 마지막 태엽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오르골 소리가 멈췄고 눈사람은 사라지기 전 마지막 힘을 짜내어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잘 자... 우리 아들. 또 만나."
동시에 시계탑의 종소리가 크리스마스의 끝을 알리며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