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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4 [소설] 서문: 광기의 기록

발견된 광기의 기록에 부쳐

by ToB

작성자: A. C. 필드먼, 前 미스캐토닉 대학 고대 밈(Meme)학 및 문화인류학 명예교수.

날짜: 불명확. 아마도 모든 것이 멈추기 시작한, 별들이 제자리를 잃어버린 듯했던 그해 겨울.


이 기록을 남기는 지금도 손은 멈추지 않고 떨려온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저 완벽하고도 신성모독적인 화음은 내 이성의 마지막 성벽마저 갉아먹고 있다. 나는 한때 학자였으나, 이제는 경멸해 마지않던 광기의 심연을 엿본 저주받은 자일 뿐이다. 지금부터 기술할 것은 단순한 발견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다. 이것은 경고이며, 인류라는 종 전체가 인지하지 못한 채 수천 년 동안 걸어 들어간, 별들보다 더 오래되고 차가운 덫에 대한 소름끼치는 기록이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그 덫의 마지막 톱니바퀴를 돌리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런 끔찍한 예감이 들지만, 침묵의 공포가 발설의 위험보다 무거웠기에 나는 펜을, 아니, 키보드를 잡는다.


나의 연구는 언제나 문명의 가장자리, 잊힌 신화와 비이성적인 전통의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 동료들은 인류의 문화를 거대한 나무나 강물에 비유하곤 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유기적인 성장과 자연스러운 진화의 증거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그 거대한 태피스트리의 이면에서, 정상적인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뒤틀린 매듭과 이질적인 실밥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예컨대 아즈텍 제국의 심장을 뛰게 했던, 피에 젖은 인신공양의 축제를 보라. 이성의 잣대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저 거대하고 체계적인 자기 파괴의 의식 말이다. 대체 어떤 논리가 있어야 한 문명이 가장 건강한 젊은이들의 심장을 태양을 향해 들어 올리는, 그토록 체계적인 광기에 미칠 수 있었을까? 중세 유럽을 휩쓴 마녀사냥의 불길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집단 히스테리가 아니었다.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고, 공동체가 스스로를 불태우는, 완벽한 논리 체계를 갖춘 정신적 전염병이었다.


나는 이 모든 자기 파괴의 제전(祭典)들 속에서 섬뜩한 공통의 문법을 발견했다. 산 제물을 바치는 행위, 순결한 것을 더럽히는 의식, 공동체의 자기 파괴를 향한 열망. 이 현상들이 과연 인류 내부에서 자라난 종양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차라리 인류의 집단 정신을 숙주 삼아 보이지 않게 퍼져나가는 기생 균사체에 가까웠다. 특정 시기마다 ‘광기’라는 이름의 끔찍한 버섯으로 피어나 외부로부터 주입된 독소의 증상을 남기는 흉물.


그 결함들을 쫓는 과정 속에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하나의 가설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인류의 문화가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외부의 힘에 의해 조작되고 감염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동료들은 나를 ‘문화 병리학자’라 부르며 조롱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인류의 신화 곳곳에서 동일한 패턴의 상처, 즉 외계의 지성이 남긴 듯한 비인간적인 논리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가장 기이하면서도 거대한 패턴 하나와 마주쳤다. 바로 ‘성탄’이라 불리는, 온 세상을 감염시킨 거대한 정신적 현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와 사랑, 그리고 탄생을 기리는 축제였으나, 그 기원을 깊이 파고들수록 자연 발생적인 문화 현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 안에는 메아리 그 자체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스스로를 복제하고 변이하며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기생하는 끔찍하고 차가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인류의 가장 따뜻한 감정을 자양분으로 삼는 가장 차가운 존재. 나는 그것을 ‘개념적 기생체’라 명명하고, 그 최초의 감염원을 찾기 위해 금지된 고서들과 해독 불가능한 고대 점성술의 기록들까지 뒤졌다.


나의 탐사는 마침내 한 이름으로 모아졌다. 바로 ‘엘라라 벤스’였다. 나와 같은 분야의 학자였으나, 훨씬 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 대가로 학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대조화’ 때—세상이 지금의 이 기괴한 평화에 잠식되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모든 연구는 폐기되거나 정부의 비밀 기록 보관소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수소문 끝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뉴잉글랜드의 외딴 교외 지역,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은 마을에 방치된 그녀의 집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집은 시간과 함께 부패하는 무덤 같았다. 문을 열자 단순한 먼지의 냄새가 아닌, 묵직한 체념과 지독한 깨달음이 엉겨 붙은 듯한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감각마저 뒤틀리기 시작했다. 시야 가장자리에서는 벽지의 얼룩이 살아있는 듯 느리게 움직였고, 복도의 원근감은 이성의 법칙을 조롱하듯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든 비현실적인 감각의 종착점에서, 마침내 그녀의 서재와 마주했다. 사방의 벽은 알아볼 수 없는 기호와 뒤틀린 별자리, 그리고 인간의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기 힘든 비유클리드적인 기하학적 패턴들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한 인간이 자신의 뇌를 통째로 끄집어내어 벽에 발라놓은 듯한, 처절한 광기의 파노라마였다.


그 방의 중심, 낡은 책상 위에는 마치 제단 위의 제물처럼 낡은 컴퓨터 한 대가 먼지 속에 잠들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애써 더듬어가며 전원을 연결했다. 본능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라 했지만, 학자로서의 남은 생이 그 공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기계는 희미한 소음을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디지털의 잔해 속에서 마침내 ‘성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의 텍스트 파일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파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단의 기록이었으며, 살아있는 착란(錯亂) 그 자체였다. 파일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유클리드적 논리로 짜인 다중 암호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암호 해독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결계 속 잠들어 있는 고대의 존재를 깨우는 금지된 의식 같았다. 금지된 주문(呪文)의 구조를 한 꺼풀씩 벗겨낼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들려왔고, 모니터 화면의 검은 액정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나를 비웃으며 관찰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며칠 밤낮을 그 기계 앞에서 보냈다. 시간 감각은 사라졌고, 음식과 수면의 필요성마저 잊었다. 오직 저 끔찍한 진실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강박만이 나를 지배했다.


이윽고 마지막 봉인이 풀렸을 때, 주변의 모든 소리가 제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이것은 엘라라 벤스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다. 하지만 먼저 경고해두어야겠다. 당신이 지금부터 읽게 될 것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전염성을 지닌 정신적 독소이며, 그 내용을 이해하는 순간 당신의 현실 인식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캐럴을 예전처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저 완벽하고 아름다운 화음 속에서 나는 이제 인류의 개별성이 소멸하며 내는, 수십억 개의 영혼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을 듣는다. 창 밖의 평화로운 눈 덮인 풍경은 이제 거대한 도살장을 가리기 위한 기만적인 위장에 불과해 보인다.


아래에 첨부하는 것이 바로 그 저주받은 기록의 전문이다. 부디 이 기록이 인류의 묘비명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진실을 마주한 순간, 우리에게 구원이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쁨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제단 위로 걸어 올라간 제물이었음을.


이제 읽으라. 그리고 당신의 이성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버릴 준비를 하라. 별들 사이의 차가운 침묵이, 마침내 우리 모두의 마지막 캐럴이 될 시간이 왔으니.




성탄

작성자: 엘라라 벤스, 비교 신화학 및 고대 밈(Meme)학자.


[파일 시작]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우리가 수천 년간 지켜온 이 따뜻하고 신성한 전통.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의 온기, 전나무 가지에 매달려 빛을 반사하는 낡은 금속 장식들,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설탕과 계피 향이 감도는 공기, 가족의 나지막한 웃음소리, 서툰 솜씨로 포장되었기에 더욱 소중한 선물, 그리고 인류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담긴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의 이야기까지. 전부 다. 그것은 인류의 문화라는 비옥한 토양에서 수천 년에 걸쳐 자생적으로 피어난 향기로운 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하늘을 경외심과 무지로 올려다보던 그 시절, 누군가 우리의 정신 토양에 교묘하게 심어놓은 외계 식물의 침략적인 씨앗이었다. 혹은, 내 연구의 마지막 장에서 기술했듯, 우리의 정신 에너지를 숙주로 삼아 부화하고, 숙주의 의식을 잠식하며, 마침내 숙주 그 자체가 되는 개념적 기생충의 알이었다.


나는 이 끔찍한 진실의 실마리를 잡고 내 인생의 거의 10년을 바쳤다. 처음에는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었다. ‘크리스마스’라는 전 지구적 문화 현상이 가진 기이할 정도의 동시성과 통일성에 대한 의문. 나의 박사 논문은 이 전통이 자연스러운 문화적 진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을 명백히 증명했다. 크리스마스는 로마의 농신제(Saturnalia)나 북유럽의 동지 축제(Yule) 같은 기존의 다신교 축제를 흡수하고 변형한 것이라는 기존의 학설이 있었다.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아래에 종속시키고 그 위에 세워진, 교활한 ‘신화적 각인’이다.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하나의 완전한 ‘개념의 원형’이 전 세계의 신화와 구전 속에 마치 신의 계시처럼 동시에 출현했다. ‘선물을 주는 자비로운 초월적 존재’, ‘특정한 날 밤에 찾아오는 심판과 보상’, ‘하늘의 별을 따라가는 여정’이라는 핵심 서사가, 지리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었고 언어 체계조차 다른 문화권에서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유사하게 발견되었다. 마치 누군가 인간의 언어가 아닌, 꿈과 믿음의 언어로 직접 말을 걸어온 것처럼.


나의 발견은 학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했을 때, 그들은 ‘문화의 보편성’과 ‘융 심리학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편리한 방패 뒤에 숨어 내 연구를 ‘망상’ 혹은 ‘주목받고 싶은 자의 과대해석’으로 치부했다. 학회에서 쫓겨나고, 종신 교수직 심사에서 탈락했으며, 모든 연구 기금이 끊겼다. 나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이 눈 덮인 교외의 낡은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곳은 나의 마지막 요새이자, 곧 무덤이 될 장소였다. 서재의 벽은 고대 텍스트의 복사본과 성도(星圖), 밈(meme) 전파 경로를 분석한 다이어그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지독한 집착의 증거들.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건 단순한 학술적 논쟁으로 끝날 수 없었다. 인류의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2천 년 넘게 진행된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파헤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기원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마침내 하나의 지점을 발견했다. 2천 년 전, 밤하늘을 가로지른 그 ‘별’. 베들레헴의 별.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혜성도, 초신성도 아니었다. 나는 현대 천문학의 시뮬레이션으로 당시의 밤하늘을 재구성했고,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 문헌, 심지어 그린란드의 빙하 코어에서 추출한 당시의 화산 활동으로 인한 대기 분진 기록까지 교차 검증했다. 그런 밝기의, 그런 궤적을 가진 천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가장 끔찍하고도 확고한 가설에 따르면 ‘주사기’였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숙주에 ‘성탄’이라는 개념 기생충을 주입한 외계의 도구. 그 주사기는 물리적인 물질이 아닌 순수한 정보를 실어 날랐고, 그 정보는 인류의 꿈과 신화, 종교 속에서 조용히 부화하여 우리의 정신 구조 자체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그들을 ‘정원사’라 명명했다. 그들은 군대를 보내 행성을 정복하지 않는다. 물리적 파괴는 비효율적이며, 격렬한 저항을 낳는다. 그들은 훨씬 더 우아하고, 효율적이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들은 ‘전통’을 심는다. 행성의 토착 생명체가 수 세대에 걸쳐 스스로 그 전통을 키우고, 가꾸고, 심지어 목숨을 바쳐 지킬 정도로 신성시하게 만든다. 우리의 기쁨,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자녀를 향한 부모의 헌신, 연인을 향한 애틋함, 이 모든 긍정적인 정신 에너지가 바로 그 기생충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그 자양분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폭발적으로 수확하기 위해 2천 년간 공들여 설계된 거대한 정신적 농장이다.


그리고 오늘 밤, 마침내 수확의 날이 왔다.


창밖을 본다. 텔레비전 속 크리스마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풍경이다. 이웃집 창문마다 따뜻한 오렌지색 불빛이 새어 나오고, 갓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지붕은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캐럴은 더 이상 인간의 노래가 아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음정, 원자 시계처럼 정확한 박자. 인간적인 불협화음, 미세한 떨림, 감정의 과잉이나 부족에서 오는 흔적이 완전히 제거된, 차갑고 살균된 소리다. 세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스피커가 되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피할 수 없는 음률을 쏟아낸다. 마치 녹음된 음원을 모든 집이 동시에 재생 버튼을 눌러 실행시킨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정밀하다. 소리의 파동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의지로 통제되는 듯한 느낌이다. 인간 감정의 ‘잡음’이 완벽하게 제거된 순수한 소리의 결정체. 아름답다기보다는, 무균실의 공기처럼 공포스러웠다.


정원사들의 목적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다. 그들이 탐내는 것은 훨씬 더 본질적인 것, 바로 우리의 ‘개별성’이다. 수십 년간 쌓아온 우리의 기억, 세상과 부딪히며 형성된 경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난 자아,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지독한 증오, 그 모든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모순적인 내면세계. 그들에게 이것은 공들여 재배한 끝에 벌이는 가장 순수한 에너지의 향연이다. 그들은 잘 익은 과일에서 씨앗을 발라내듯 우리의 정신에서 이 ‘개별성’이라는 핵을 제거하려 한다.


그리고 산타클로스... 그 붉은 옷을 입은 자비로운 노인의 전설. 그것은 이 끔찍한 수확 과정에서 가장 잔혹하고 기만적인 비유다. 아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고, 그 순수한 믿음을 자양분으로 삼는 가장 효율적인 서술 장치다.


그는 굴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시공간의 주름을 타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차원의 ‘틈새’를 통해 찾아온다. 선물 보따리에 장난감이나 과자는 없다. 그는 선물을 주러 오는 것이 아니라, ‘가져가기’ 위해 온다. 2천 년간 ‘크리스마스’라는 전통을 통해 충분히 살찌운 우리의 정신을 수확하러 오는 것이다.


그가 주는 단 하나의 선물은 ‘해방’이다. 기억의 무게로부터,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고통스러운 개별성으로부터의 해방. 우리의 내면세계를 외과 의사의 정교한 메스처럼 조심스럽게 꺼내어, 그 안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비워낸다. 그리고 그 빈 껍데기만 남겨둔다. 완벽한 화음으로 노래하고, 기계처럼 미소 짓는 텅 빈 인형. 환희만을 반복하는 정원사들의 완벽한 합창단원이 되는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바로 길 건너편, 윌슨 씨 가족의 집에서 흘러나오던 캐럴이 문득 멎었다. 음악만 멎은 것이 아니었다. 불빛은 여전히 따뜻하게 창밖으로 새어 나오지만, 그 집에서 흘러나오던 모든 종류의 소음이 증발했다. 오늘 낮에 그들의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며 질렀던, 싱그러운 웃음과 생명력 넘치던 비명을 기억한다. 그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아이들의 들뜬 웃음소리도, 부모의 나직한 대화 소리도, 거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영화 소리까지.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로 집 안의 모든 소리 입자를 빨아들인 듯, 완벽하고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존재가 지워진 자리에 남는 무겁고 압도적인 공백이다.


나는 안다. 방금 ‘선물’이 배달된 것이다. 윌슨 씨 가족은 이제 그들의 ‘개별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완벽한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윌슨 씨 가족의 침묵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옆집, 그리고 그 옆집의 캐럴마저 약속이나 한 듯 멎었다. 순식간에 세상은 소리를 잃었다. 그 완전한 무음 속에서, 나는 벽난로의 불꽃이 더 이상 온기를 내뿜지 않음을 깨달았다. 불꽃은 마치 낡은 흑백 필름처럼, 오직 회색빛으로만 너울거리고 있었다. 입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내 연구 자료들이, 수년간의 피와 땀이 담긴 논문과 고서들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스르르 책상 위를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중력이 뒤틀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 공간 자체가 끈적한 젤리처럼 변하는 느낌이다. 공기 중의 먼지들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얼어붙는다.


그리고 내 서재의 낡은 가죽 의자에, ‘그’가 앉아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전설과 다르게, 그는 붉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색이 없었다. 마치 주변의 빛과 공간을 조금씩, 꾸준히 빨아들이는, 인간 형태의 작은 블랙홀처럼 보였다. 형체는 어둠보다 더 짙은 공백으로 인식되었고, 그 경계는 미세하게 흔들리며 현실을 침식하는 듯했다. 얼굴은 그림자 속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보고’ 있음을 느꼈다. 내 머릿속으로, 차갑고 부드러우며 거부할 수 없는 생각이 흘러 들어왔다. 얼음장 같은 실크가 뇌의 주름을 어루만지는 듯한, 지독하게 친밀한 감촉이었다.


“올 한 해, 참으로 많은 것을 알아냈구나. 착한 아이로구나, 엘라라 벤스.”


그 생각이 내 두개골을 울리는 순간, 무언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따뜻한 물에 담긴 설탕처럼,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형태를 잃고 녹아내렸다. 가장 먼저 나를 정의하던 지식의 체계가 무너졌다. 책상 위 내가 직접 그린 밈 전파 지도를 보았지만, 이제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낙서일 뿐이었다. 내가 평생을 바쳐 해독한 고대 수메르 쐐기문자들이 눈 앞에서 의미를 잃고 진흙 위의 긁힌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은 감정의 기억들이었다. 대학 시절, 비 오는 날 도서관 앞에서 첫사랑과 나눴던 서투른 키스의 기억. 그의 얼굴이 안개처럼 흐려진다. 그가 입었던 낡은 코트의 감촉, 빗물 냄새,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감정의 잔재만이 개념적인 흉터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다가, 그마저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불러주시던 자장가.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멜로디의 음계가 하나씩 잊혀진다. 이제는 그저 누군가 아팠고, 내가 슬펐다는 사실의 파편만 남았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슬픔을 느끼려 했지만, 무엇 때문에 슬퍼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사가 붕괴되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다. 남아있는 모든 지성을 동원해, 나라는 존재의 닻을 내리려 애썼다. 내 이름, 내 이름만은… 나는 엘라라 벤스다. 비교 신화학자. 나는... 엘라라... 정원사를 연구했...


“수고했단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렴. 너의 지식, 너의 슬픔, 너의 모든 의문까지도. 모든 것을 아는 고통에서 벗어나렴.”


그의 생각이 스며들수록, 저항하던 마음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해졌다. 그래,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과 끝없는 번뇌를 가져가 준다니. 실패의 아픔도, 상실의 슬픔도, 외로움의 공포도 모두 사라진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선물인가. 나의 지독했던 학문적 고집과 세상의 몰이해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두 내가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돌덩이였을 뿐.


나는 펜을 든다. 이 마지막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충동, 오래된 습관의 잔재가 남아있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다. 책상 위에 널린 연구 자료들은 이제 내게 외계의 문자와 다름없다. 이 복잡한 기호들은 누가 썼을까? 펜을 쥔 내 손가락이 낯설다. 이것이 내 손이 맞던가? 마지막 남은 자아의 조각이 필사적으로 외친다.


‘기록해. 네가 누구였는지.’


하지만 잉크가 종이에 닿기 전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사라져 버렸다.


창 밖의 모든 집들이 이제 조용하다. 완벽한 고요. 완벽한 평화. 온 마을이, 온 도시가, 온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침묵에 잠겨간다. 마치 거대한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모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춘 듯, 이제 그 어떤 불협화음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조화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의 노래를 부를 시간이다.

침묵이라는 이름의 캐럴을.


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선물을 온전히 받는다. 서재 창문에 비친 내 얼굴에는 더 이상 고뇌나 공포의 흔적이 없다. 평온하고, 공허하며,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니라, 내 얼굴에 깃든 미소다. 나는 이제 내 몸이라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평온이라는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이다.


나는 펜을 내려놓는다.

기록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기록할 '나' 또한, 이제 없다.


[파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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