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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Feb 21. 2019

안녕, 나의 23살

반짝이던 스물셋, 그리고 반짝이는 스물여덟을 위해

2014년 8월. 당시 23살의 대학교 3학년이던 나는 가을 학기를 맞아 스웨덴의 작은 도시인 '린셰핑'이라는 곳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작동되지 않는 현지 유심칩을 부여잡고 '이 낯선 땅에 인터넷도 없이.. 나는 고립되었어. 엄마, 아빠 보고 싶다. 나 한국 갈래'를 외치며 엉엉 울었던 첫날. 첫날 벌어진 혼돈의 카오스와는 달리 이후, 나는 6개월 동안의 린셰핑 생활에 너무나도 잘 적응했으며, 린셰핑에서의 일상은 가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반짝반짝' 했노라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같이 교환학생을 떠난 친구와 '린셰핑 다시 가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린셰핑을 입에 달고 산 지 어언 5년. 이렇게 말로만 가고 싶다 가고 싶다 노래 부르다가는 50년이 지나도 갈 수 없겠다는 생각에 친구와 나는 덥석 스웨덴행 비행기 표를 끊었고, 2019년 2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스웨덴으로 떠났다.



01. 오랜만이야, 나의 학교


린셰핑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Linköping University. 린셰핑에 교환학생으로 있는 동안 Swedish 수업과 Nordic Culture, Drama 수업을 들었던 바로 그곳. 수업을 듣던 강의실도, 공부 좀 하는 척해보려 들렀던 도서관도, 파티가 열리던 이름 모를 건물도, 모두 다 그리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웠던 건 Key Building 1층에서 단돈 18 크로나(한화 약 2,300원)에 팔던 카네불라와 커피 세트였다.


학교 정문을 지나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착한 Key Building. 문을 열자마자 눈 앞에 조그마한 카페테리아가 5년 전 그 자리에서 반겨주었고, 우리는 Fika(스웨덴의 커피 브레이크)를 즐기기 위해 서있는 학생들 뒤로 얼른 줄을 섰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차례. 5년 만에 다시 만난 카네불라를 접시에 담고 커피까지 야물딱지게 주문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때, 포스기 화면에 선명히 찍혀 있는 36 크로나. 내 기억과는 다른 금액에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 5년이나 지났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게 더 이상하지...'라고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하며 현금을 건넸는데.. 이런, 자기들은 현금은 안 받는단다. 이 동네가 이렇게 변화무쌍한 동네였나 새삼 놀라며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 건넸다.

  

가격과 지불 방법은 변했지만, 카네불라와 커피의 환상적인 앙상블은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카네불라와 커피로 몸과 마음을 녹인 후에는 Drama 수업을 들었던 2층 강의실로 향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라기보다는 사실 핑계에 가까운 것들로) 인해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연기에 대한 미련이 살포시 남아 있었던지라 교환학생 수업 중에 드라마 수업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바로 신청을 했다.


딱딱한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강의와는 달리 드라마 수업은 그 흔한 책상과 의자 하나 없는 교실에서 진행됐다. 뛰어다녀도 될 정도의 넓은 공간과 교실 앞 쪽에 구비된 작은 나무 무대, 그리고 오래된 피아노 한 대가 전부였던 강의실. 그곳에서 스물셋의 나는 어느 하루는 '숲 속의 유니콘'이 되었다가, 다음날은 '성장통을 겪는 10대 소녀'가, 또 하루는 '놀부 와이프'가 되어가며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더랬다.


그렇게 책상과 의자 대신 웃음소리와,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했던 연기들로 강의실을 가득 채웠던 그때를 떠올리며 2층 계단을 오르자 어느덧 도착한 3150 강의실. 학생증이 없어 강의실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문에 난 조그만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이전에는 없던 책상과 의자들이 생겨있다. 이제 이 곳에서는 드라마 수업을 안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워지려던 찰나, 눈에 익은 교실 앞 자그마한 무대와 교실 뒷 편의 피아노가 보였고, 가장 좋아하던 것들은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부 와이프 역할을 맡아 흥부 역의 오빠 뺨을 실제로(실수로) 주걱으로 내리치는 메소드 연기를 펼쳤던 드라마 강의실

02. 오랜만이에요, 주인 아주머니&아저씨


흔히 사람들은 스웨덴은 미식과는 거리가 먼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단언컨대 스웨덴 린셰핑은 숨은 맛집이 참 많은 곳이다.

학교에서 기숙사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길에 항상 지나쳤던 가정식 집이 있었다. 소시지 모양의 간판이 인상적인 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먹었던 대구로 만든 생선가스는 강슐랭 스타 3개가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음식 맛만큼이나 잊을 수 없었던 건 바로 가게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스웨덴어로 가득한 메뉴에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하느라 고군분투하던 나와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영에 메뉴판을 가져다주시던 주인 아저씨. 음식이 나온 후에도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사이드로 나온 감자가 모자라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챙겨주시던 주인 아주머니. 소박하지만 온기 가득한 음식만큼이나 따스한 분들이었다.

소시지 모양의 간판이 눈에 띄는 가정식 집

그리고 다시 찾은 가정식 집. 비록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셨지만(못 알아보시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 그 따뜻한 미소와 환대와 친절함만은 여전히 그대로이신 두 분이었다.

무엇보다 생선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린셰핑에 돌아가면 꼭 먹고 말리라 다짐하게 했던 대구가스 역시 맛도, 온기도, 여전히 최고였다.

 

보기에는 얼마 안 되어 보이지만 먹다 보면 그 양에 흠칫 놀라게 되는 감자튀김 또한 그대로였다.

03. 다시 만나서 반가워, 나의 기숙사


린셰핑에서 세계 각국의 음식과 술, 노래, 그리고 젊은 청춘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그곳은 바로 기숙사 건물이 모여있는 Ryd다. 린셰핑에 있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 중 하나이기에, 추억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한 Ryd. 자취 만렙 오빠 기숙사에서 김장도 하고, 공용 냉장고에서 냄새로 존재감 뿜뿜하는 집 김치 때문에 다른 외국인 친구들 눈치가 보인다던 언니네 기숙사에서 김치전도 해 먹고, 콜라로 찜닭까지 만들어 먹는 등 여기가 스웨덴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화려한 한식 대첩이 벌어지기도 하던 우리들의 기숙사였다.

Ryd 간판이 보이면 이제 집에 다 왔구나 하는 안락함이 들곤 했다.

5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난 기숙사는 흰 눈이 여기저기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눈 덮인 길을 지나 일주일에 4-5번씩 장을 보던 Ryd의 핫 플레이스 hemköp(슈퍼마켓)에 들렀다. 입구부터 찬찬히 한 바퀴 둘러보고 있자니 당장에 파스타와 마늘 몇 쪽을 사 가지고 들어가 알리오 올리오를 해 먹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hemköp에 들어설 때 직원 분께서 'Hey!'라고 외친다고 내가 뭘 잘못했나 쫄지 않아도 된다. 'Hey!'가 아니라 'Hej'라고 스웨덴어로 정겹게 인사를 건낸 것이니

반가움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hemköp을 나와 내가 살던 기숙사 동으로 향했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주소, Alsättersgatan 1. 역시나 키가 없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 서서 유리로 된 기숙사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안을 보고 있자니 2층에서 이케아 쇼핑백에 빨래거리를 담은 스물셋의 내가 계단을 총총 내려올 것만 같았다.

겉모습은 허름해 보여도 내부는 아늑하기 그지없다(는 한 때 내 기숙사였던 곳에 대한 다소 편향적인 생각이다)

누군가 건물 안에서 나오면 마치 이 곳에 사는 학생인 양 자연스럽게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꽤 시간이 지나도 나오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기에 기숙사 문 앞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안녕, 나의 28살


5년 만에 다시 찾은 린셰핑은 몇몇 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 특히나 내가 좋아했던 것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이 많았다. 학교 카페테리아의 카네불라와 커피도, 강의실 안 작은 무대와 피아노도, 가정식 집의 주인 부부와 음식도, hemköp도, 기숙사도.


그때의 모습을 간직한 린셰핑에 있는 내내 이 곳에 다시 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벅차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벅참의 또 다른 한 켠에는 꼭 무언가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느낌 또한 함께 있었다. 이러한 느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지만 여행 중에는 여행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느낌적인 느낌에 대한 답은 다음에 찾기로 하고, 스웨덴에 있는 동안은 남은 여행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약 8박 9일간의 스웨덴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미뤄두었던 질문의 답에 대해 침대 위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 느낌을 왜 받았을까를 가만히 생각해보다 문득, 린셰핑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반짝이던 스물셋의 나’는 그곳에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처음에는 조금, 아니 솔직히 조금 많이 슬펐다. 아, 언제 어디서나 밝게 웃던 스물셋의 나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이내, 또다시 ‘문득’ 든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스물여덟의 내가 스물셋의 나를 반짝반짝하게 기억하듯, 어쩌면 5년 뒤 서른셋의 나는 지금의 스물여덟인 나를 반짝반짝하게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 이런 글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중학생 때는 초등학생 때가 좋았지,
고등학생 때는 중학생 때가 좋았지,
대학생 때는 고등학생일 때가 좋았지,
직장인이 되어서는 대학생일 때가 좋았지,
노인이 되어서는 젊을 때가 좋았지라고
말하곤 하죠.

그런데 혹, 눈치채셨나요?

당신의 인생은 항상 좋았다는 거



비록 반짝반짝하던 스물셋의 나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앞으로 더욱 반짝반짝하게 기억될 스물여덟의 내가 되기 위하여.


안녕, 나의 린셰핑.

안녕, 나의 스물셋.


그리고 다시,

안녕, 나의 스물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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