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든다는 것, 그리고 물들인다는 것은
작년 여름, 친구와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독립 출판'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친구: 요즘에 독립 출판이 대세더라
나: 맞아, 독립 책방 관련 게시물 같은 것도 인스타에서 자주 보이더라
친구: 그니까. 독립 출판물 내는 사람들 완전 멋지더라
나: 맞아, 대단하더라
친구: 나도 언젠가는 독립 출판물 하나 내보려구
나: 그래, 책 나오면 내가 꼭 읽을거라더라
나름 '힙'한 소재를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와 나는 대부분의 대화가 그렇듯 '기약 없는 다짐'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전, 친구로부터 사진과 함께 카톡이 왔다.
친구: 지수...! 나 뭐 하나 홍보해도 되니
친구: (구매 링크와 함께 고이 보내진 책 커버 사진)
대부분의 대화가 그랬듯, 그날의 대화도 기약 없는 다짐으로 마무리된 줄 알았거늘. 이 친구, 진짜로 책을 냈다. 그렇다면, 책 나오면 꼭 읽겠다던 나의 다짐 또한 '기약 없음'에서 '기약 있음'으로 발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카톡으로 보내온 링크를 통해 바로 책을 구매했다. 빨리빨리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살고 있는 덕분에 주문한 지 이틀 만에 책을 받았다. 받자마자 포장을 뜯어 마주한 책에는 어딘지 모르게 친구를 빼다 박은 귀여운 일러스트와 <그깟 뿌리염색을 하지 않아도>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고, '오, 제목 쫌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며 첫 장을 넘겼다.
'이 친구 이거 글 좀 쓰는 걸?'이라는 다소 거만한(?) 감탄과 함께 술술 책을 읽어 내려가던 중, 어떤 한 부분이 '탁' 하고 제동을 걸었다.
멍하니 예시 답안을 옮겨 적다 보니, 학생들의 답안지는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입시 논술 학원에서 첨삭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인공 해진이 자신의 손에 들린 빨간 펜 아래 놓인 학생의 첨삭지를 바라보며 든 생각이 적힌 부분이었다.
이전까지 '물들다'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긍정과 부정 중 긍정에 가까운 쪽이었다. 그래서인지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어느 하나 생소한 단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충격과 약간의 섬찟함을 주었다.
입시 논술 학원을 다녀 본 사람이라면 빨간색 펜으로 빼곡히 코멘트가 적인 B4 용지 크기 정도의 원고지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논술 학원을 꽤 열심히 다녔던 학생 중 한 사람으로서 그때 그 원고지에 적혀 있던 코멘트 몇몇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한 문장은 최대 50자가 넘지 않도록 하세요', '근거에 해당하는 부분은 최소 3개 이상 써 주세요', '해당 문제는 비교/대조의 형태로 답안을 써 주세요'.
논술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적은 글>이라고 한다(Thanks to 네이버).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논술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로 '각기 다른 생각들'을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가가 핵심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논술 답안지는 대부분 '틀림'에 대한 정정이 빨간색 펜으로 채워지곤 했다.
빨갛게 물든 원고지에 대한 무언지 모를 불편함은 나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해진에게 역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녀가 미용실에서 보인 행동을 보면 말이다. 해진은 남들이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길게 자라 버린 머리 뿌리를 염색하러 퇴근 후 미용실에 들렀다. 하지만 뿌리를 물들이면 새로 자란 부분이 '상할 수 있다'는 미용사의 말에 해진은 불현듯 정해진 예시 답안에 맞춰 자신이 빨갛게 물들였던 학생들의 답안지를 떠올렸고, 이내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그깟 뿌리염색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지저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앞서간 색으로 똑같이 물들 필요는 없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이, 그것도 이미 염색약을 다 개어 놓은 상태에서 나오는 일이 여간 미용사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가 더 이상 남들 눈치 보느라 자신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기를 과감히 포기한 데서 나온 용기가 아닐까 싶다.
이렇듯 과감히 물들기를 포기한 해진의 용기와 결단을 부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고 살아가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곳에서는 물들지 않음이 '고립'과 '배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물들려 하거든 혹은 물들어야 하거든, 이왕이면 가장 좋은 방식으로 물들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해 고민한 결과 다음과 같은 나름의 답을 내려 보았다.
혹, 물들려 하거든 '정해진 예시 답안'이나 '앞선 색'처럼 남이 정한 색이 아닌, '나의 색'을 간직한 채 다른 색에 다가가자.
마치 각자의 고유한 색은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색과 자연스럽게 물들고, 물들여 한 폭의 어여쁜 그림을 만드는 '수채화'처럼.
지금부터 쓰는 글은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하면 마치 엄청난 뒷이야기 혹은 비밀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다소 난감한 기대를 낳을 수 있기에, 보면 소소한 재미를 얻을 수 있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무방한 '쿠키 글'이라 칭하겠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몰랐겠지만, 머릿속에 계획으로만 맴돌던 '브런치'를 실행으로 옮기게 된 계기가 바로 작가 친구가 쓴 이 책이었다.(작가 호칭에 잠깐이라도 피식하라고 한 번 붙여보았다.)
생각해보면 이 친구는 나의 일상에 있어서 참 새롭고, 다양한 첫 경험을 많이 선사해 주었다. 첫 독립 영화 GV, 첫 마라탕, 첫 베트남 커피, 그리고 첫 브런치 등등. 같이 있다 보면 '참 종잡을 수 없는 색'을 지닌 친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종잡을 수 없음이 당연시했던 것들에 물음을 던지게 하고,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꼭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혼자서는 해보지 않았을 일을 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 덕에 이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나의 일상과 생각의 공간 또한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서평의 마무리라는 핑계 삼아
그 친구에 대한 조금(어쩌면 조금 많이) 오글토글한 감사 인사를 전해볼까 한다.(하루를 담백하게 마무리하고 싶으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괜찮을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다음 문장을 읽게 되는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오글토글은 세 줄 정도 띄우고 시작하겠다.)
To. <그깟 뿌리염색을 하지 않아도>의 저자이자, 자연스러운 반 강매의 달인인 유 모씨에게
- 너의 색이 물들어 나의 일상이 한 층 다채로워졌음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