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마음이 고팠을 당신에게
01. 늦은 밤, 냉장고 문을 여는 이유
우리 집에서는 가끔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엄마이다.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지는 시각은 저녁 시간을 지나 하늘이 한 뼘 더 깜깜해질 무렵. 때때로 엄마는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입맛이 없다며 밥그릇에 밥을 정말이지 쥐 씨알만큼 담아 먹곤 한다. 밥 한 숟갈, 반 찬 몇 젓가락, 국 한 숟갈, 식사 끝. 그럴 때면 회사에 있는 동안에도 썩 영양가 있는 식사를 잘 챙겨 먹지는 않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쿵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러한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10분이 채 되지 않아 엄마는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게 없나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약 15분 정도의 간격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어쩔 때는 콜라비 5조각을 꺼내 먹기도 하고, 어쩔 때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은 채 다시 냉장고 문을 닫는 등의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분명 입맛이 없다고 밥은 숟가락을 스치듯 먹어 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냉장고를 열어 먹잇감(?)을 찾는 이 모순된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신기함과 놀라움, 호기심이 일곤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컨디션이 안 좋거나 기분이 좀 메롱일 때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울컥 짜증이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저녁을 좀 잘 먹지, 왜 자꾸 냉장고 문은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건지 원'이라는 말을 삼키며 말이다.(막상 글로 써 놓으니 다소 싹퉁머리가 없어 보인다. 반성해야겠다.)
몇 주 전에도 역시 엄마의 모순된 행동이 나의 눈에 포착되었고, 나는 도대체 평소와 오늘 같은 날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이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날은 엄마의 기분이 유독 다운되어 있던 날이었다. 춘천에 계시는 외할머니의 건강이 조금 안 좋아지셨기 때문이었다. 연세도 있으신 데다 몇 년 전에는 큰 수술까지 받으셨던 터라 외할머니의 건강은 엄마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 중 하나이고, 때문에 매일 안부 전화를 드리며 외할머니의 컨디션과 건강 상태를 체크하곤 한다. 그런데 그날은 외할머니께서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마의 미스터리 한 행동이 보이는 날에는 그날과의 공통점이 있었다. 회사에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렸다거나, 외할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거나,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이러저러한 일들로 어딘가 마음 한 켠이 헛헛할 때, 그러한 모순된 행동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아, 어쩌면 엄마는 배가 아니라 마음이 고팠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쉽게도 나는 애교가 썩 많은 타입이 아니다. 이렇듯 엄마가 마음이 좀 헛헛한 날에는 "엄마, 힘내세요~ 지수가 있잖아요~ 뿌잉뿌잉"하는 애교도 부리고, 옆에 찰싹 붙어서 아양도 좀 떨고 하면 좋으련만.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것을 보니 애교 알레르기가 있음에 틀림없다.
비록 애교를 뿜뿜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나 나름대로 엄마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한 방안을 하나 강구했더랬다.
바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같이 보기.
뭐 그런 위로 같지 않은 위로가 다 있냐고 어이없어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론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또한 그런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이거나 혹은 이미 본 방송일지라도, 그런 날이면 엄마 옆에 앉아 같이 TV를 보곤 한다. 무뚝뚝한 딸내미의 서툴고, 티 나지 않는 무언의 위로랄까.
먹거리는 점점 다양해지고, 많아지는데 이상하게도 갈수록 ‘허기’를 느끼는 사람 또한 점점 느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함께 드니, 참 아이러니하다.
나 역시도 때로는 분명 삼시 세 끼에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끝에 왠지 모를 허기가 찾아오는 날이 있었다. 무언지 모를 불안감과 걱정, 고민과 함께.
그리고 이런 날들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글을 쓰다 보면 비어있던 마음 한구석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면 내가 글을 통해 마음을 채우듯, 나의 글을 읽는 누군가 또한 작디작은 위로를 받거나, 피식하고 웃어 보이거나, 잔잔한 공감을 얻을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하루 끝에 왠지 모를 허기가 찾아오는 날이면 어느 노래 가사와 같이 '초콜릿처럼 꺼내 먹을' 수 있는, 마음이 고픈 나의 엄마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오늘 역시 생각해 본다.
참, 그리고 엄마.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이따가 스페인 하숙 같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