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만 쉬어도 기특한 너
6살 형님이 된 첫째가 어느 날부턴가 동생이 한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으응?? 성격이 완전 다른 동생 때문에 매일 즐겁지만은 않을 텐데도 어찌 또 동생을 바라는지 웃기기도 했고,
그래도 동생이란 존재가 싫지는 않구나 싶어 안심도 되었다. 그냥 한 번의 이야기일 줄 알았던 동생 타령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엄마는 너희 둘로 너무너무 행복해서 아기는 또 낳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정말 동생이 생기길 바라면 한번 기도해 봐." 아이에게는 말한 것과 달리 솔직한 나의 마음은 셋째도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아이 둘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데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하며 난임 병원에 동결보존하던 배아를 폐기결정했던 터였다. “혹시 자연임신으로 셋째가 온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럼 그 아이는 그저 내게 위로가 될 것 같아. 그럼 나는 조리원 한 달 갈 거고 산후도우미도 한 달을 부를 거야. “남편에게 농담으로 자주 했던 말들이었다. 지나간 일들이긴 했지만 오랜 난임기간 동안 생각 않고 말하는 이들로 인해 상처로 남은 말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깊이 배인 말은 “너는 태어나길 그렇게 자연임신이 안 되는 몸으로 태어난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왜 난 아무런 말도 못 했을까 싶은데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나의 작아진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심한 몸살이 왔던 어느 날,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으며 육아를 해야 하니 약을 좀 세게 지어달라 부탁을 드렸다. 약국에선 처방된 약을 조제해 주며 항생제 용량이 두 배이니 복용 전 임신여부 테스트를 꼭 해보라며 테스트기를 함께 주셨다. 얼떨결에 함께 결제하면서 나는 해볼 필요 없는데 굳이 사야 할까 싶었지만 다시 꺼내놓지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식사 후 약을 먹으려다 임테기가 생각나 그래도 구매했으니 한번 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버리려는 순간 놀라서 다시 들어서 확인을 했다. "어머 어떡해!! 두줄이잖아??"
첫째와 둘째는 임신 여부를 피검사로 확인했기에 이렇게 임테기 두줄은 생소했다. 당황한 나는 자연임신으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저기 있잖아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나오면 임신인거지?”
“당연하지! 99퍼센트 임신이지. 왜, 누가 임신했는데?” “응… 나… 임테기 사진 한번 봐줄래?”
“언니! 이건 백 프로 임신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심장이 너무 뛰기 시작했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럼 내가 지금 임신인 거야? 자연으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아이들을 윗집에 잠깐 부탁하고서 차를 몰고 산부인과로 갔다. 운전하면서도 내 심장은 얌전히 있지 못하고 쿵쿵댔다. '가만 좀 있어봐, 심장아!'
의사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생리 날짜와 들고 간 임테기 두줄을 보시며 “ 셋째 임신하셔서 오셨군요.”라며
반기셨는데 나는 무표정으로 "초음파로 확인해 봐야 알지 않을까요? “ 라며 재촉했다. 나중에 출산 전,
의사 선생님께서 웃으며 말씀해 주셨는데 그날 내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셋째 임신이 반갑지 않구나' 하고 오해하셨다고 한다. 드디어 초음파를 통해 아기집과 손톱 크기만 한 아기를 확인하고, 초음파 사진을 받고서야 믿을 수 있었다. '어머, 어떡해 진짜였어..' 남편에게 전화해서 이야기하니 깜짝 놀라며 웃는다.
셋째는 딸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두의 기대와 다름을 아이는 본인의 성별을 일찍 한 번에 알려주어 진료실에서 남편과 나는 빵 터져서 웃고 또 웃었다. 남편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상에! 우리 여보가 아들 셋 엄마가 되다니! “ 나는 남편에게 “자기야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나는 목욕탕 함께 갈 딸 없어. 당신은 좋겠다. “아이들은 남동생이란 사실을 듣고서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와…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웃음을 주는 아이라니.. 참 궁금해하고 기대하던 우리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이 아이는 예정일보다 훨씬 이르게 태어나서 앰뷸런스를 타고 NICU에 입원하는 이벤트를 제일 처음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대학병원 진료는 몇 년 뒤 수술실에 아이를 눕혀두고 나오는 날까지 이어졌다.
조산이었던 셋째는 시력, 청각, 고환, 나중엔 언어까지 수월하게 지나온 게 없었다. 게다가 아주 예민하고 고집도 강한 아이는 7세까지 키워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셋째와의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 첫째와 둘째만큼의 또 다른 사랑과 기쁨이 있어서 더 행복해질 것을 기대했고, 또 얼마나 예쁠까? 기대했었다. 근데 나는 셋째를 키우며 웃는 날보다 한숨 쉬며 우는 날이 많았고, 기다리고 마음 졸이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신생아 시절 뇌초음파 판독 결과 뇌실이 덜 채워져 있어서 적어도 1년 동안의 기본 발달이 잘 이루어지는지를 추적 검사해봐야 한다는 소견이 있었기에 개월수에 맞는 움직임이 있는지를 매 순간 바라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백일잔치 때 사진을 찍기 위해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다 결국 사진기를 내려놓고서 울어버렸다.
나와 눈 맞춤이 전혀 안된다. 청력 검사 역시 계속 리퍼가 떠서 추적검사 중이었던 때인데 이제 안과도 시작이구나. 그때부터 내게 과호흡이 시작되었지만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대학병원 안과, 이비인후과, 소아비뇨기과 유능한 의사 선생님이 계신 곳을 밤새 검색하고 또 예약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마음 붙잡고 아이를 안고 다녔다. 아이의 예민함과 고집으로 시달리며 명치가 아플 정도로 힘들던 어느 날, 나는 펑펑 울며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만 좀 떼쓰고 말 좀 들어. 너를 낳고 엄마는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어." 첫째와 둘째는 그럼에도 어린 아기인데 혼내지 말라며 나를 말리고는 셋째에게 '엄마랑 놀지 말자'말하며 데리고 가서 맞춰주는 모습을 보며 나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랬던 아이가 7세가 되고 곧 초등학교 갈 준비를 시작해야 할 무렵 나는 깨달았다.
초등 입학 전 한글 공부와 수학 공부를 열심히 시켰던 형들과 달리 막내에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매일 아침 안 간다고 떼쓰던 어린이집을 무사히 등원해서 잘 다녀오는 것만으로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눈수술 이후 안경을 잘 쓰고 다니는 것으로, 본인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혼자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셋째는 내게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기특한 아이였다.
개월 수에 맞게 성장하며 보여주는 행동들이 결코 쉬이 일어나지 않았던 셋째를 키우며 나는 작은 일상을
해내는 것에서부터 제대로 감사하기 시작했고, 내가 바라는 성장 속도는 내려놓고, 아이의 속도대로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냈다. 그 시간들을 겪으며 나의 체력은 고갈되어도 그 사이에 나의 생각의 크기는 자라 있었나 보다. 첫째와 둘째도 이런 나를 응원하듯 막내가 걸음마를 해내고, 배변 훈련을 해내면 손뼉 치며 기뻐하며 함께 기특해했다. 나만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통해 나 역시 자라고 있었고, 견뎌내고 있었던 것 같다. 셋째는 우리 가정에 그런 존재로 와주었던 것이었다.
두 돌 넘어서까지 새벽에 깨던 아이가 드디어 통잠을 자던 해방의 날부터 나는 잠자리 분리를 해서 지금까지도 따로 재우고 있다. 더 품고 자야 하나 싶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밤만이라도 쉼이 필요했고, 아침에 개운한 몸으로 반갑게 만나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나 대신 밤마다 첫째가 막내를 데리고 가서 함께 잠들곤 하는데 때론 그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언젠가 첫째가 내게 말했다. "저 6살 때 동생 갖고 싶어서 밤마다 자기 전에 기도했었는데 진짜로 동생이 생겨서 좋아요." 내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버거운 시간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구나. 가족 모두가 함께 겪고 성장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첫째와 둘째가 나를 웃게 만들었다면 셋째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막내의 애교가 시작되고 내 눈에서 셋째를 향한 진짜 사랑의 빛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얘는 참 느리더니 애교도 사랑도 이제 시작인가 봐.
너는 그냥 사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