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펼치면 수많은 기호가 말을 걸어옵니다.
보통 빠르게 연주하라는 모데라토(Moderato), 강렬하게 내지르는 포르테(Forte), 그리고 숨죽이듯 속삭이는 피아노시모(Pianissimo)까지.
학창 시절 음악 시간, 시험을 위해 달달 외웠던 이 용어들은 사실 작곡가가 연주자에게 보내는 간절한 편지입니다.
"내 마음을 이런 느낌으로 전달해 달라"는 당부와도 같지요.
문득 우리의 '언어'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 역시 누군가에게 내 마음의 선율을 들려주는 하나의 연주이기 때문입니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악보의 표기가 필요하듯, 우리도 내 마음을 오해 없이 전하기 위해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아주 여리게 말의 완급을 조절해야 합니다.
베토벤과 슈만은 유독 한 단어를 사랑했습니다.
바로 **'innig(이니히)'**라는 표기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진심 어린 감정으로' 혹은 '내밀하게'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연주자들에게 특별한 숙제를 안겨줍니다.
'innig'를 마주한 연주자는 기교를 뽐내거나 감정을 과하게 확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그곳에서 길어 올린 가장 자연스럽고 친밀한 소리를 들려줍니다. 꾸며낸 화려함이 아닌,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인 셈입니다.
우리의 대화에도 이 'innig'가 절실한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말의 속도나 세기에만 집착하곤 합니다.
더 분명하게, 더 강하게, 더 논리적으로.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감정입니다.
말이 빠르든 느리든, 그 밑바닥에 '진심 어린 감정'이 흐르고 있다면 어떨까요?
화려한 미사여구나 날카로운 논리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진심으로 건네는 한마디가 상대에게 가닿을 때,
우리 삶의 수많은 오해와 갈등은 안개처럼 걷힐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내 입을 통해 나가는 말들은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울려 퍼지는 교향곡이 됩니다.
이 곡의 지휘자이자 연주자는 오직 나뿐입니다.
나는 오늘 어떤 소리를 내보낼 것인가.
입술을 떼기 전, 잠시 'innig'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통과한 진심이 상대의 마음에 따뜻한 공명으로 남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첫 음을 떼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