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상하이가 생각난다

그 도시의 햇살, 그리고 내 마음에 남은 장면들

by 온빛

처음 상하이에 간 건 8년 전쯤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가깝고, 비행기표가 쌌다.

친구랑 "어디 가지?" 하다가, "상하이 어때?" 해서 간,

정말 아무 계획도, 기대도 없던 여행이었다.


부산-제주 가듯 마음 가볍게 갔는데,

도시는 가볍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오자마자,

사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치 불꽃축제 직후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풍경,

그런 것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는 느낌이었다.

한 걸음 떼면 사람, 두 걸음 떼면 또 사람.

어쩌면 나는 그냥 ‘사람’이라는 재료로 만든 도시를 처음 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좋았다.


지하철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도시는 의외로 깨끗했고

보라색 동그라미를 머리에 얹은 동방명주는

광안리 야경보다 솔직히 더 예뻤다.

(부산 사람으로서 이 말을 하는 건 꽤 큰 용기이다ㅎㅎ)


아침의 상하이는 더 특별했다.

이른 시간, 호텔 밖으로 나갔더니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체조인가? 했는데

누군가는 긴 봉을 돌리고,

누군가는 커다란 부채를 활짝 펴고,

어떤 무리는 단체로 옷을 맞춰 입고 있었다.


요가도 아니고, 발레도 아니고, 무용 같기도 하고…

그냥 각자의 템포로 조심스럽게 흔드는 단체 안무.

그런데 그게 어찌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이던지.


나는 가만히 멈춰서 그들을 한참 바라봤다.

“아침을 이렇게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니.”

그 광경이 참 부러웠다.

몸을 푸는 그들의 여유, 시간, 웃음.

나도 언젠가 저렇게 하루를 시작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엔 중국이 조금 두려웠다.

구글도 안 되고, 언어도 모르고,

괜히 이상한 재료를 쓸까 걱정되고,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하나 주문하는 데

바디랭귀지와 눈빛, 혼신의 표현력이 다 동원됐다.

그런데 그 알바생,

진짜 내 말 알아들으려고 너무 애쓰는 거다.

진심이 느껴졌다.

‘세상에, 이렇게 열심히 알아들으려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때 느꼈다. 착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구나.


또 다른 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어느 대형 카페에 들어갔다.

‘중국인데 물은 깨끗할까, 뭔가 이상한 걸 넣지는 않을까…’

슬쩍슬쩍 제조 과정을 지켜보며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마신 음료는

지금까지 마신 어떤 음료보다 맛있었다.


카페 안 사람들은

우리 동네와 다를 게 없었다.

지인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노트북으로 뭔가를 정리하고,

한가로운 음악 속에서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순간 좀 부끄러웠다.

편견은 참 쉽게 만들어지지만,

누군가를 가까이서 바라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조금 알게 됐다.


상하이엔 웃긴 기억도 많다.

지하철 타기 전엔 짐검사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사람은 수십 명인데 기계는 한두 대뿐.

관찰해 보니 다들 그냥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있었다.

처음엔 ‘어? 이거 뭐지?’ 했지만

다음 나도 중국인 모드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음 속도 +100,

표정 OFF,

긴장감 OFF,

당당함 MAX.


그렇게 지나가면 정말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검사대 옆에 서 있는 경찰인지 직원인지도

그냥 나를 지나가게 두었다.

그날 나는 꽤 프로페셔널한 중국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상하이를 몇 번 더 갔다.

심지어 한 번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유 시간이 3시간밖에 없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와이탄 한 번 걷고 싶어서 환승 데스크를 뚫으려 했다.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렸다.

“3시간이면 위험해요. 나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사진첩을 꺼냈다.

동방명주, 커피잔, 웃고 있는 내 얼굴, 와이탄 야경.

그리고 말했다.


“저 진짜 상하이 좋아해요.

길도 다 알아요.

진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금방 들어올게요.”


직원은 한참 나를 보더니

“……그래요. 다녀오세요.”

그 순간 나는 내심

상하이 명예시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하이는 내게 여행지라기보단, 여름 한 조각처럼 남았다.

내가 처음으로 낯선 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기억.

그래서 다시 걷고 싶은 거리. 다시 보고 싶은 햇살.


다시 여름이 왔다.

햇빛이 쨍쨍해질수록

나는 그 아침 무용단이 떠오르고,

그 맥도널드 알바생의 진지한 눈빛이 생각나고,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았던 와이탄의 부드러운 바람이 그리워진다.


그때 그 햇살을 다시 느끼며, 여름의 상하이를 이렇게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