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준 사진전을 보고 꺼내본 나의 뉴욕 한 페이지
나는 건물에 별 감흥이 없는 사람이다.
건물은 딱딱한 공간이라는 생각에,
예쁜 건물을 봐도 “우와, 예쁘다~” 하고 그냥 지나치는 스타일이다.
감탄은 해도, 정을 붙이진 않는 거리감 같은 것.
그런 내가 뉴욕에서는 건물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낡은 비상계단, 유난히 가늘고 길게 열린 창문들,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파란 하늘.
지금 와서 보니
나는 건물 자체보다,
건물과 건물 사이 ‘틈’에 더 반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도시의 숨통 같은 그 틈.
복잡하고 바쁜 풍경들 속에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계속 기록하고 있었던, 여유의 구멍 같은 장면들.
어느 순간 갑자기 풍경이 탁— 하고 열린다.
센트럴파크는 도시 한가운데 뚫린, 초록색 쉼표 같다.
바쁜 뉴욕의 틈바구니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또 다른 세계.
잔디밭엔 웃통 벗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누워 있었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어떤 이는 책을, 어떤 이는 노트북을,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조심스럽게 찍었다.
몰래.
그들의 여유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거기 눕히듯이.
그리고… 나도 그 옆에 눕고 싶었다.
진심으로. 아주 많이.
그 순간, 나는 뉴요커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날의 나는 계획적인 여행자였다.
센트럴파크는 ‘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는 포인트’였고,
다음 목적지는 MOMA.
고흐의 별 헤는 밤을 보기 위해, 폐관 시간 전에 입장해야 했다.
누워 있는 사람들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나도 잔디에 눕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결국엔 그 여유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긴다.
잔디밭과 별 헤는 밤 사이에서, 나는 별을 택했다.
별 헤는 밤은, 화면 너머로 보던 것과 달랐다.
물감이 도톰하게 발려 있었고,
그 질감 사이로 고흐의 감정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내 마음도 조금은 말라 있었다.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좋았다. 정말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어딘가엔,
그날 누워보지 못한 잔디밭 하나가 고요히 눕혀져 있다.
돌아보니 나는 여름을 많이 찍는다.
외국을 여행한 사진들 대부분이 여름이고,
그 사진엔 언제나 햇빛이 묻어 있다.
한국의 여름은 눅눅하고 버겁지만,
뉴욕의 여름은 달랐다.
공기는 청량했고, 빛은 맑았고,
햇살이 몸에 달라붙지 않고 위에서만 반짝였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계절의 틈,
햇빛과 그림자 사이의 공간들을 나는 계속 찍고 있었다.
그건 그냥 풍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계절이었다.
얼마 전, 부산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이경준 사진전: ONE STEP AWAY에 다녀왔다.
그의 사진 속 뉴욕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센트럴파크, 잔디, 거리의 사람들, 고층 건물들.
그 사이의 공기와 간격. 그 모든 게 내 기억 속 여름과 닮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멀리서 틈을 찍었지만,
그는 담대하게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시선이지만 같은 도시,
다른 거리감이지만 비슷한 공기.
사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울컥했다.
‘그 여름을, 나도 잘 바라보고 있었구나.’
기억은 잊히는 게 아니라,
때론 그냥 저장돼 있다가
이렇게 사진 한 장에 다시 열리는 거였다.
사진은 결국,
누가, 언제, 왜 찍었느냐의 기록이다.
내 사진엔
못 누웠던 여유와,
놓쳐버린 틈의 아쉬움,
그리고 그래도 남겨두고 싶었던 여름의 한 장면이 담겨 있다.
혹시 당신의 사진첩에도 그런 순간이 있나요?
그땐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가
제대로 앉아보고 싶은,
그 잔디밭 같은 여름의 기억.
※ 이 글은 부산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이경준 사진전: ONE STEP AWAY》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사진은 모두 본인 촬영
여행 시기: 2019년 여름, 뉴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