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설계한 완벽한(?) 모임
나는 심심하면 대형마트에 구경 간다. 새로 출시된 신상품들을 구경하며 소소한 재미를 찾는 게 취미다. 특히 코스트코는 외국 제품이 많아서 마치 해외여행 온 기분을 낼 수 있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코스트코 출입이 까다로워졌다. 회원권 없이는 아예 들어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회원권 검사가 엄격해져 홧김에 코스트코 회원권을 끊어버렸다.
'좋아, 이제 모든 생필품을 코스트코에서 산다!'
그렇다고 결심한게 소비라니. 1인 가구에게 코스트코 회원권은 사치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 해보기로 했다.
화장품, 옷, 식재료까지. 정말 열심히 코스트코를 이용했다. 하지만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유통기한 3일 남은 빵 10개, 계란 두 판, 브로콜리 거대팩. 1인 가구가 감당하기엔 양이 너무 방대했다. 결국 절반은 버리게 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환경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지만, 그래도 회원비는 뽑아야 한다는 강박이 더 컸다.
빵 10개를 3일 안에 먹는 방법을 진지하게 구글링 하던 나를 발견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우연히 '대형마트 소분 모임' 영상을 봤다. 진짜 이런 게 있다고? 당장 검색해 보니 내 주변에도 활발한 소분 모임이 여러 개 있었다.
'이거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야!'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회원권이 있는 나에게는 완벽한 솔루션이었다. 나도 바로 코스트코 소분 모임을 만들었다.
규칙도 깔끔하게 정했다. 마트 오픈 시간에 만나서 제품 구매 후 푸드코트에서 바로 소분하고 깔끔하게 헤어지기. 소분 어려운 육류는 제외. 완벽한 계획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입자를 기다렸다. 며칠 기다렸다. 그런데...
완전 고요.
아무도 안 왔다. 정말 아무도. 문의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내가 너무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었나 싶어서 며칠 더 기다렸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결국 내가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인간의 망각은 참 자비롭다.
몇 주 후, 우연히 새로운 코스트코 소분 모임 영상을 봤다.
'어? 나도 모임 만들었는데... 아, 맞다. 아무도 안 온 그 모임!'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순히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모임은 어떻게 운영되나 구경해 보자며 영상을 클릭했는데...
세상에.
사람들은 마트에서 실시간 카톡으로 소통하며 즐거워했다. 계산 후에는 어딘가로 이동해서 엑셀로 정리하고 저울로 정확히 재며 소분했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모두들 웃으며 즐거워했다. 소분하고 남은 음식들을 함께 나눠 먹으며 마무리하는 모습까지.
그 순간 깨달았다.
'사람들은 소분보다 소통에 관심이 있구나!'
실시간으로 "이거 살 사람?" 하며 메시지 주고받는 재미, 함께 고민하고 선택하는 즐거움,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다음엔 뭐 사볼까?" 하는 설렘까지.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건 단순한 할인이 아니라 함께하는 경험 자체였던 것이다.
내가 만든 모임은 철저히 비즈니스였다. 효율적이고 깔끔한 거래 관계. 하지만 사람들은 모임에서조차 연결과 소통을 원했던 것이다.
나는 원래 인간관계에 서툴다. 무심하고, 혼자가 편하며, 뭔가 뭉쳐서 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 나였기에 모임의 핵심 포인트를 놓치고 내 입맛에만 맞게 만든 거였다.
아, 내가 진짜 바보였구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사회초년생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직장인 문화모임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술자리 금지!'
연극 보고, 원데이 클래스 듣고, 요트 타면서 단체 할인받아 알차게 문화생활 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술자리는 관계를 망치고 모임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남자들이 "술자리 진짜 안 해요?" 물어보더니 한 번만 나오고 사라졌다. 그때마다 우리는 짜증 났다. '아니, 모임에 소개팅하러 왔나!'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맞다. 그들은 정말 소개팅하러 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남자들의 의도는 뻔했다. 순수했던 건 모임을 만든 나와 내 친구뿐이었던 거다. 우리는 정말 문화생활을 사랑했단 말이다...
그런 흑역사가 있으면서도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나는 정말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데 서툰 것 같다. 효율성만 추구하고, 감정적 교류는 어색해하고, 혼자 있는 게 편한 사람이니까.
근데 이게 나쁜 건가? 모든 사람이 모임장 기질을 가질 필요는 없잖아.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외롭고, 어떤 모임이든 그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 한다는 걸 이제야 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심심해서 마트에 구경 가고, 코스트코 회원권 끊으면서까지 소속감을 찾으려 했으니까.
다만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랜다는 것뿐이다. 사람들과의 깊은 교감보다는 조용한 관찰을, 왁자지껄한 모임보다는 혼자만의 소소한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뿐.
그래서 앞으로는 모임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참여만 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훌륭한 모임장이 되고, 나는 성실한 모임원이 되면 되는 거니까. 각자의 재능은 다른 법이다.
코스트코 회원권도 그냥 혼자 열심히 쓰면서, 유통기한 3일 남은 빵 10개든 계란 두 판이든 창의적으로 소비해 보자. 빵 푸딩, 계란찜, 프렌치토스트... 1인 가구 대용량 소비의 달인이 되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웃픈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