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달러 아끼려다 인생 수업을 얻었다

당황은 잠깐, 배움은 오래 남았다

by 온빛

사기를 두 번 당했다. 당황은 잠깐이었지만, 배움은 오래 남았다.





"내가 가격 비교해 보고 티켓 예매할게. 여기서 사면 12달러 더 싸!"

친구의 눈이 반짝였다.

"그냥 가서 표를 사도 괜찮아~"

"12달러면 커피 두 잔 값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이 12달러 때문에 얼마나 값진 경험을 하게 될지.





1막: 표는 있었지만, 자리는 없었다


뮤지컬 당일, 오페라하우스는 너무 조용했다. 공연 10분 전인데 사람이 안 보였다. 좀비 영화처럼 텅 빈 로비.

"... 우리 날짜 잘못 본 거 아니야?"

매표소 직원에게 예매자 이름을 대자 컴퓨터를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예매 내역이 없는데요?"

친구 얼굴에서 피가 싹 가셨다. 친구가 다급하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아니, 분명히 예매했어요. 여기 티켓 있잖아요!"

상급자가 호출됐다. 그리고 표가 있으니 일단 해당 자리로 안내해 준다고 했다.


우리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불은 꺼져 있었고 배우들은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손전등 불빛을 따라 우리 좌석으로 갔는데, 거기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같은 좌석 번호의 티켓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온 우리는 멘붕이었다. 친구 손은 떨렸고, 내 등엔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백발의 최고 매니저가 나타났다. 60대쯤,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매니저였다. 그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직접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차분한 목소리. 우리는 중개 사이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티켓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손목시계를 보였다.


“공연 시간이 다르네요. 안타깝지만… 사기를 당하신 것 같아요.”

사기. 그 단어에 친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매니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말 유감이에요. 잠시 후 10분 뒤에 인터미션이 있고, 이후에 약 한 시간 정도 공연이 남았어요. 앞줄에 빈자리가 몇 석 있는데, 괜찮다면 그 자리에서 보시겠어요?”

"정말요?"

“괜찮습니다. 제 재량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렇게 한국에서 먼 길 오셨잖아요.”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매니저는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매뉴얼을 찾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을 봤다.


인터미션 때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중개업체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안내받은 앞자리로 갔다.

무대가 너무 가까웠다. 배우들의 표정, 땀방울, 의상 디테일이 다 보였다. 원래 뒷자리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생생함이었다.


나오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나... 저런 상사 밑에서 일하고 싶어."

저런 게 진짜 프로지.





2막: 두 번째 사기, 두 번째 행운


이틀 후 아침.

"오늘 동물원 갈래?"

"응."

친구가 핸드폰을 들었다. 나는 직감했다.

"여기 중개 사이트에서 할인하네! 이번엔 괜찮을 거야. '입장 시간 전까지 카톡 발송'이래!"

나는 약간 걱정되었다. 친구의 알뜰함은 사기도 못 꺾는구나.


타롱가 동물원까지 1시간을 가서 카페에서 음료를 마셨다.


10시 45분.

친구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안 왔어."


10시 55분.

"... 아직도 안 와."


11시.

입장 시간. 티켓은 오지 않았다.

"아, 진짜! 왜 또 이래!"

친구가 고객센터에 연락했다. 알고 보니 상담사는 AI 상담사였다.


11시 20분.

나는 친구 어깨에 손을 올렸다.

"됐어. 너 잘못 아니야. 그냥 매표소 가서 표 끊자. 어차피 환불될 거야."


매표소 직원은 꽤 나이가 든 여성이었다. 짧은 흰머리에 전형적인 할머니 모습으로 퇴직 후 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 사정을 들은 그녀가 말했다.

"영어 티켓이 안 왔으면 티켓이 없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살게요."

"물론이죠!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그녀가 갑자기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special discount 해드릴게요."


가격을 보고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개 사이트보다 더 쌌다.

친구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멍하니 티켓을 받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 동물들을 보며 친구가 말했다.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아? 표 안 와서 난리였는데 오히려 더 싸게 샀잖아."

"그니까. 그분... 참 너무 고마워."


나중에 확인하니 중개업체에서 사과 메일이 와 있었다. 직원이 아파서 근무를 못 했다고. 취소 처리도 해주겠다고.


결국 우리는 환불도 받고, 할인 입장권으로 동물원도 즐겼다.




에필로그: 똑똑하게 나이 드는 법


두 사건의 공통점.


60대 이상 추정.

5분 안에 상황 파악.

자신의 재량으로 도움.

규정보다 사람.


오페라하우스 매니저와 동물원 직원.

두 사람이 보여준 건 '경험으로 완성된 프로'였다. 매뉴얼에 갇히지 않고, 권한을 휘두르지 않고, 나이 들수록 더 유연해지고 따뜻해지는 것.


시드니에서 마지막 날, 친구와 나는 얘기했다.

"이번 여행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그 매니저분."

"나도. 그리고 동물원 직원분."


우리는 오페라하우스, 하버 브리지, 본다이 비치 등 시드니의 모든 곳을 다 봤다. 사진도 수백 장 찍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진 속에 없는 순간들이었다. 당황하고 식은땀 흘리다가 누군가의 선의로 구원받았던 순간들.


12달러를 아끼려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얻었다.


살면서 어쩌면 또 표가 안 오거나, 날짜가 틀리거나, 좌석이 겹칠 수도 있다.

그래서 뭐 어떤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멋진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60대가 되면 누군가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실수는 언제나 일어난다. 중개 사이트는 또 실수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이 되느냐다.


똑똑하게 나이 드는 건, 더 많이 아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더 높은 자리에 가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더 낮은 곳을 보는 것이다.


시드니에서 배운 가장 값진 교훈.

그 교훈은, 12달러 할인된 사기 티켓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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