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History'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나에게는 '어른'에 대한 이상한 로망이 하나 있다.
바로 혼자 바에 가서 술 마시기.
드라마를 보면 꼭 나온다. 주인공이 인생 최악의 날을 보내고 바에 앉아 "늘 먹던 걸로 주세요" 중얼거리면, 바텐더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밀어준다. 그리고 주인공의 처량한 얼굴 클로즈업. 조명은 은은하게, 재즈는 감미롭게.
아, 저게 바로 어른의 세계구나.
어린 나는 그렇게 세뇌당했다. 그래서 확신했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혼자 바에서 술 한잔쯤은 폼 나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정확히는 술만 마시면 얼굴이 119 출동 레벨로 빨개진다. "아니 술 안 마셨어요!"라고 아무리 해명해도 내 얼굴이 "이 사람 취했습니다" 하고 실시간 중계한다. 완벽한 배신자.
그렇다고 술자리를 좋아하냐고? 천만에. 20대 때는 그래도 여기저기 모임을 전전했다. 밤새 놀다가 새벽 6시 귀가 → 샤워만 하고 출근하는 좀비 코스프레도 해봤다. 극한 직업이었다. 심지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달리는 택시 문 열고 도로에 토한 전설도 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음날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본 건 안 비밀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기사님께 정말 정말 죄송하다...)
하지만 30대가 되니 몸은 안 따라주고, 무엇보다 이 철학적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대체 왜 술을 마시는가?"
한때 칵테일 만들기를 배우고 싶었다. 이유? 쉐킷쉐킥 하는 거 개 멋있어 보임. 바텐더가 셰이커를 어깨 위로 던졌다가 받는 장면을 몇 번 직관하니, 그 어떤 운동선수보다 멋있어 보였다. 나도 저러고 싶었다. 근데 곧 깨달았다. 술은 라면과 같다. 남이 만들어주는 게 제일 맛있다는 우주의 법칙. 칵테일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조용히 떠나갔다. 안녕, 모히또. 잘 가, 마가리타.
캐나다 살 때는 술을 사려면 술 전용 매장에 가야 했다. 나는 가끔 그곳에 가서 세계 각국의 술들을 구경했다. 러시아 보드카, 일본 사케, 프랑스 와인... 마치 유엔 총회 같았다. 그리고 종종 병이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매했다. "이건 유리병에 금박이 있어!" "이건 병 모양이 하트야!" 맛? 그건 나중 문제였다. 일단 인테리어 소품으로 합격이면 장바구니 행. 치즈가 저렴해서 치즈 안주에 와인 한두 잔 홀짝이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혼자 집에서 와인 글라스 들고 창밖 바라보면 뭔가 주인공 된 기분이랄까.
한국 돌아와서는 진토닉에 빠졌다. 특히 오이를 얇게 썰어 넣어 여름에 마시는 그 상큼함이란! 정말 시원하고 세련된 맛. 그것도 한 시즌 못 가 "뭐야 별로네" 하고 끝났다.
이렇게 술에 대한 모든 관심사는 '우와 대박!' 했다가 '뭐지 이게 전부야?' 하며 금방 식어버렸다. 마치 새해 다짐처럼 화려하게 시작했다가 1월 15일쯤 조용히 묻히는 것들. 자격증, 헬스장 등록증 같은 존재. 아마 내 몸이 태생적으로 술을 거부하는 체질이라서겠지.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혼자 바에서 술 마실 줄 알아야 한다. 이건 내 안에 뿌리 깊이 박힌 신념이었다. 거의 종교 수준. 그래서 길을 걸을 때마다 나의 첫 바 도전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집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15~20분 거리, 도망가기 딱 좋은 거리)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곳 (테이블 5~8개 정도?)
손님이 너무 많지 않은 곳 (내가 튈까 봐)
너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곳 (은은한 조명 필수)
너무 조용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곳 (적당한 웅성거림)
바텐더가 센스 있어서 스몰토크 한두 마디만 하고 혼자 있게 내버려 두는 곳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찾기란 마치 조선시대 과거 급제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그곳을 발견해 버렸다.
퇴근길에 우연히 발견한 간판. 'History'.
최근에 새로 생긴 듯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지하 1층. 창문으로 보이는 은은한 조명. 손님이 많아 보이지 않는 적당한 한산함. 완벽하다.
그날부터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계속 눈여겨봤다.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 집 앞을 지나가듯이. '언젠가 저기 들어갈 거야...' '오늘은 아니야, 아직 준비가...' '다음에, 다음에는 꼭...'
평범한 수요일 저녁. 퇴근하는데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날씨도 선선하고 좋았다. 집에 빨리 들어가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누구를 만나기는 귀찮은,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그런 날이었다.
그때 느꼈다. '바로 오늘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나도 드라마 주인공이 되는 건가? 저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건가?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음으로(속으로는 심장 터질 것 같았지만)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심호흡.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어른이다.'
문을 열었다.
띵동~
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조명, 모던한 인테리어, 적당한 음악 볼륨이 나를 맞이했다. '오... 대박... 완벽한데...?' 그때 긴 생머리의 예쁜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키 크고 날씬하고 화장도 완벽했다. 마치 잡지에서 나온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나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술 한잔 하러 왔는데요."
완벽했다. 목소리 떨림 0%. 시선 처리 완벽. 마치 '나 이런 거 자주 해봤어요' 하는 분위기. 속으로 나를 칭찬했다. '잘했어, 이제 자리 안내받고 앉아서 메뉴판 보고 뭐 시킬지...'
그런데.
그녀가 나를 3초간 빤히 쳐다봤다.
말없이. 그냥. 응시.
'... 왜?'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국어였는데 한국어가 아니었다. 무슨... 레즈비언? 게이바? 뭐라는 거지? 내가 이해한 건 딱 하나였다. "... 그런 곳이에요."
'그런 곳...? 그런 곳이 뭔데...?'
나는 당황해서 가게 안쪽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안쪽에서 또 다른 예쁜 여자가 나왔다. 좀 더 어려 보이는, 그러나 역시 예쁜. 그 사람도 나를 보자마자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내가... 잘못 온 거구나...'
하지만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혹시 내가 오해한 건 아닐까? 혹시 저 사람들이 나를 손님으로 환영하는 특이한 방식인 건 아닐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나가야 하는 거죠...?"
첫 번째 여자가 미안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희는 언니 같은 분이 오시는 곳이 아니에요."
"... 아 네.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뛰지는 않는 속도로(어른이니까)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복귀했다.
"후우..."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심장은 아직도 두근거렸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돌았다.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었어...?'
'History라는 이름은 대체 무슨 의미였던 거야...?'
'나만 몰랐던 건가...?'
발걸음을 옮기는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마치 인생 첫 면접에서 떨어진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어이없는 기분이었다. 면접은 적어도 준비 부족이라도 하지, 이건 뭐 출발선도 못 찾은 느낌?
집으로 가는 10분이 10시간처럼 느껴졌다.
길거리 사람들이 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저 사람 방금 이상한 데 갔다 나왔대.'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나의 첫 바 도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구나.
드라마 주인공은 개뿔. 나는 그냥 구글지도 없이 여행 떠난 길치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유튜브 영상만 봤다. 자꾸 History 문 열던 순간이 리플레이됐다.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날 이후 나는 더 신중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쫄았다.
유튜브나 인스타를 넘기다가 분위기 좋은 바가 나오면 자동으로 체크리스트가 돌아간다. '저기 혼자 가도 되나?' '손님 많아 보이지 않나?' '조명 괜찮네?' '바텐더가 말 많이 안 걸 것 같은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혹시 나 같은 사람 받아주는 곳 맞나?'
판단 시간: 1초.
아직 완벽한 곳을 찾지 못했다. 아마 다음번에도 저번처럼 눈여겨보다가 무작정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제발 사전 조사 좀 하고 가자... 네이버 리뷰도 보고 블로그도 뒤져보자...)
나에게도 언젠가 단골 바가 생길까?
계속 말 걸지 않으면서도 내가 혼자 있는 걸 자연스럽게 허락해 주는 곳. 한 잔만 시켜도 눈치 안 주는 곳. 재즈가 흐르고 조명이 은은한 곳.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들어가도 되는 곳.
그런 곳에서 나도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늘 마시던 걸로 주세요."
상상해 본다. 바텐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잔을 밀어준다. 나는 그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다. 창밖을 바라본다. 재즈가 흐른다. 나는 오늘 하루를 생각한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괜찮다. 나는 혼자가 좋다. 이 순간만큼은.
괜히 어른 같고 멋있어 보여서 나의 로망이 되어버린, 혼자 바에서 술 마시기.
나의 도전은 언젠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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