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몰라도 되는 용기

노르웨이 베르겐 여행

by 온빛

요즘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자극적인 것에 끌리는 사람,

화려한 도시와 강렬한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확신이 흔들린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뭐였지?

나는 정말 나를 알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어느 여름에 여행 갔던 베르겐이 떠올랐다.











여름이면 더운 바람이 불고, 반팔을 꺼내 입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노르웨이에서 패딩을 입고 피오르드를 건너고 있었다.

햇빛은 있었지만 따뜻하지 않았고, 바다는 여름인데도 가을처럼 잔잔했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나는 이 여행이 왜 다시 떠올랐을까.










베르겐에서는 비가 자주 내렸다.


보통 비가 계속 내리면 사람들은 짜증을 낸다.

날씨 탓을 하고, 우울해하고, 빨리 그치기를 바란다.

그런데 베르겐 사람들은 달랐다.

비를 받아들이고, 비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비는 그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비 냄새와 바다 냄새가 섞인 공기.

젖은 돌바닥 위로 반짝이는 색색의 목조건물들.

우산 아래로 스치던 따뜻한 숨결 같은 바람.


나는 거기서 우산이 귀엽게 그려진 후드티를 샀다.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었다.

그 도시가 비를 대하는 태도, 불편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그 마음을 함께 가져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산 건 옷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던 것 같다.











노르웨이는 부유한 나라다.

그런데 베르겐에서 만난 사람들은 부유함을 과시하지 않았다.

아니,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나무 건물 안의 작은 가게, 항구 근처의 오래된 카페, 조용히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장식을 파는 상점들.

그곳의 사람들은 빠르지도, 일부러 느린 척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화려하지 않은데 단단한 무언가.

증명하지 않아도 충만한 존재감.

애쓰지 않아도 되는 여유.


내가 정말 부러워하는 건 화려함이 아니라 이런 거였구나.

자기 자신으로 충분한 사람들.

무언가를 더 가지지 않아도, 더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내가 화려함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다.











베르겐의 색감은 특별했다.

비가 내리면 건물들은 더 선명해지고, 비가 멈추면 항구는 더 조용해졌다.


그 풍경을 보는데 갑자기 부산이 떠올랐다.

색색의 집들이 모여 있는 항구 도시.

바다 냄새와 사람들의 온기가 섞인 공간.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그 묘한 감정.

설렘인데 동시에 안정감.

새로운데 집 같은.


나는 완전히 새로운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익숙함과 낯섦이 섞인 그 경계, 그 애매한 지점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베르겐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사우나였다.


발끝을 담그면 살이 얼얼할 만큼 차가운 바닷물.

그 위에서 들어간 뜨거운 사우나.

몸과 마음이 동시에 깨어나는 느낌.


차갑고 뜨겁고.

고요하고 생생하고.


"너도 이렇잖아. 겉은 차갑고 조용한데, 안은 뜨겁고 생생한 사람. 한쪽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싶어 했다.

새로운 걸 좋아하는 사람,

자극을 좋아하는 사람.

그런데 진짜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낯설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도파민에 반응하고, 자극을 사랑하는 사람.

반짝이는 도시, 강렬한 경험, 화려한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것에 설레고,

화려한 도시에서 숨이 트인다.

모험을 좋아하고,

처음 보는 풍경에 가슴이 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베르겐을 떠올리며 깨닫는다.

내가 정말 오래 기억하는 건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는 걸.


피오르드처럼 장엄한 풍경보다, 비가 내리는 항구에서 조용히 흘렀던 시간.

따뜻한 미소를 나누던 사람들.

너무 비싸서 헛웃음이 났던 식탁 위의 작은 순간들.

바다 위에서 뜨끈한 김을 마주하던 사우나.


이런 작은 장면들이 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나는 '도파민을 좇는 사람'이기 전에, 감정을 깊게 저장하는 사람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조용히 곱씹고, 의미를 찾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려는 사람.

백 번의 화려함보다 한 번의 잔잔함이 더 오래가는 사람.


이것도 나였다. 아니, 어쩌면 이게 더 진짜 나다.











베르겐 여행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강렬함 속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야. 잔잔한 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사람이야."


"완전히 새로운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익숙함과 낯섦이 섞인 그 경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너는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아. 그게 정상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혼란스러운 게 당연해. 너는 아직도 계속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니까."


이 대답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다.

여행을 떠날 때는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찾아갔지만, 정작 얻은 건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붉은 목조건물,

젖은 항구,

비 냄새,

북극여우 백팩,

우산 프린트 후드티,

사우나의 뜨거운 김,

차갑고 따뜻한 공기,

그 위를 천천히 걸어가던 그때의 나.


그 기억이 조용히 속삭인다.

"너는 괜찮아. 너는 지금도, 계속 너 자신에게 돌아가는 중이야."


나는 나를 완벽하게 알 필요가 없다는 것.

나는 계속 변하고, 계속 발견되고, 계속 다시 정의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


베르겐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이것이었다.

나를 모르는 게 두렵지 않게 된 것.


어쩌면 여행은 내게 낯선 풍경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던 풍경을 다시 발견하게 해 주고,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조용히 소개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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