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위키드
공연이 끝났을 때, 나는 바로 박수를 치지 못했다.
객석은 이미 환호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콜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대를 보고 있으면서 내 삶이 떠올랐다.
손뼉을 쳐야 할 타이밍을 놓친 채 잠시 앉아 있었다.
마치 나 혼자 다른 박자로 살아온 사람처럼.
그 순간 아주 또렷하게 깨달았다.
나는 꽤 오래,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살아왔다는 것을.
큰 기대 없이 보러 간 공연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부산에 내한공연이 왔다는 소식에 친구가 같이 보자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날 무렵, 위키드는 더 이상 한 편의 뮤지컬이 아니었다. 나를 비추는 거울에 가까웠다.
글린다는 묻는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악한 걸까, 아니면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전혀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타고난 걸까, 아니면 연습하면 되는 걸까.
며칠 전 회의실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노트북들이 일제히 열려 있었고, 누군가 새로운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거 하면 임팩트 클 것 같아요."
"재밌겠다."
"윗선에서도 좋아할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가능성을 먼저 봤다.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 일정 증가
→ 협업 부서 확대
→ 커뮤니케이션 비용 상승
→ 결국 누군가는 과부하
문장을 받아 적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왜 나는 늘 기대보다 부담을 먼저 보는 사람일까.
예전의 나는 이것을 단점이라고 믿었다.
내가 사회성이 부족해서,
요령이 없어서,
조금 덜 유연해서.
그래서 한동안 노력했다.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맞장구치고,
조금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쉽게 지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늘 생각했다.
오늘의 나는 진짜였을까.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잘 보이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삶과
나답게 있기 위해 에너지를 아끼는 삶 사이에서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분명해졌다.
나는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있었다.
순간의 호감과 맞바꾸는 피로,
설명해야만 유지되는 관계,
나중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는 시간.
그 비용을 치르느니 차라리 조금 무뚝뚝한 사람이 되는 편이 나았다.
회의가 길어지고 방향이 흐려질 즈음, 아무도 꺼내지 않던 말을 대신했을 때가 있다.
"이거 결국 누가 맡게 되나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는 물을 마셨고,
누군가는 화면을 넘겼다.
그리고 몇몇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집단은 늘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그래서 가끔은 기준선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그 역할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글린다는 사회생활의 완성형에 가깝다.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지 알고,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지도 빠르게 판단한다.
호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 몫을 챙긴다.
오랫동안 나는 그런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부러웠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동안 서서히 인정하게 됐다.
저건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언어가 아니라,
애초에 선택하지 않은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걸.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통과한다.
누군가는 관계를 넓히며 나아가고,
누군가는 기준을 세우며 걸어간다.
그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였다.
"For Good"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극장은 놀라울 만큼 조용해졌다.
글린다와 엘파바는 서로를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끝까지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그 장면을 보며 오래 생각했다.
모든 친구가 인생의 동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
지금의 진심이 훗날 멀어짐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그 시간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함께 걷는 구간이 달랐을 뿐이다.
나는 늘 관계가 멀어질 때마다 실패했다고 느꼈다.
붙잡지 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하지만 어쩌면 관계에도 계절이 있는 건 아닐까.
봄을 함께 보낸 사람과
겨울까지 함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관계가 조금 느슨해졌다.
덜 실망했고, 덜 서운해졌다.
붙잡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가볍게 했다.
관계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하게 됐다.
피에로가 엘파바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다르게 보게 됐어."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본다는 뜻이었다.
사랑은 ‘좋아하는 이유’보다
‘함께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더 가깝다.
이 사람 옆에 있을 때 나는 더 나다워지는가.
아니면 더 조심스러워지는가.
감정을 말할수록 편해지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줄이게 되는가.
답은 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엘파바가 "Defying Gravity"를 부르는 장면에서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내 본능을 믿고, 눈을 감고, 뛰어내릴 시간이야."
그건 환경이 바뀌길 기다리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자기 자신을 먼저 정의하겠다는 태도.
돌이켜보면 나는 늘 준비가 끝난 뒤에야 나를 선택하려 했다.
충분히 괜찮아진 다음에야 기준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순서는 반대였다.
기준이 먼저이고,
확신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이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나를 이렇게 살겠다고 정하는 것.
그게 어른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극장을 나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이번에는 박수를 치는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치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치고 싶어서 치는 박수를.
그리고 조용히 결정했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나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기로.
설명해야만 유지되는 관계 대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선택하고,
좋아 보이는 길보다
덜 흔들리는 길을 걷기로.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을 필요도 없다.
기준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니까.
못 해서가 아니라,
굳이 하지 않기로 한 선택들이
앞으로의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매끄러운 사람이 되는 것보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이
내 삶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https://youtu.be/ScKmmvFn3Sc?si=z4lvdqLl5IZqnTx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