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아니고 봄이 엄마로 살기 (봄의 왈츠)"
두 번째 브런치 북으로 "유쾌한 똥수씨"를 쓰려고 했는데 아직도 관계의 숙제가 많은 남편과의 이야기는 좀 미뤄두고 장애를 가진 첫째 아이의 이야기를 먼저 써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출판사에 투고하면서 작품의 의도와 방향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쓰고 싶은 글과 독자들에게 읽힐 글, 그리고 출판사에서 선호할 만한 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했다.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지면 좋으련만 쉽지 않다. 고민에 큰 소득은 없지만 자꾸 생각하다 보면 조금씩 조화를 이룰지도 모른다.
그냥 글이 좋아서 쓰는 것 자체를 즐기며 출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해탈의 자세를 보이는 작가들도 있지만 나는 더 욕심을 부려 출간을 꼭 해야겠고 유명해질 때까지 쓰려고 한다. 아니 계속 글을 쓰기 위해서 유명해져야겠다.
"엄마 없는 밤"을 기존에 읽었던 독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질끈 감고 두 번이나 고쳐 글을 올린 이유도 출판사에 내놓을 만한 완성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초보의 어설픔을 다듬어 가려니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가장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빛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고치고 또 고쳤다.
억척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퇴고의 힘을 알게 되었다. 글 쓰는 실력도 늘어 갔다. 어렵겠지만 앞으로도 많은 퇴고의 시간을 거쳐 글을 완성하려 한다. 한편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더라도 말이다.
이 말을 또 하는 이유는 다음 편이 오래 걸린다면 공들여 퇴고 중이니 기다려 달라는 변명을 미리 날려 독자의 이해를 구하려는 꼼수인 것이다.
첫째 아이 봄이는 올해 열여덟 살이 된 장애인이다. 며칠 전 주민등록증 발급 통지서가 집에 도착했다. 아이 어릴 적 기억들이 아직도 선명한데 벌써 주민등록증이라니... 남의 집 아이들 크는 것을 보고 놀라듯 나도 이미 훌쩍 자란 내 아이들을 보면 가끔 새삼스레 놀란다.
어둡고 좁을 터널을 걸을 때 시간은 멈춘 듯 더디 흘렀다. 무기력했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맵고, 짜고, 쓰기만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먼 길을 걷고 걸어 어느새 나는 빛 가운데 서 있다. 인내하며 지나온 날들은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고 달디 단 열매를 선물로 남겼다.
"봄의 왈츠"는 쇼스타코비치 왈츠를 흥얼거리며 봄이와 왈츠를 추던 장면을 기억하며 지었다. 뱅글뱅글 도는 스텝을 따라 하던 봄이는 엄마의 발을 밟고는 깔깔대며 뒤로 넘어간다. 제멋대로 추는 봄이와의 왈츠는 마치 아이의 삶이고 나의 삶인 것만 같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삶의 왈츠를 완성해 갈 수 있도록 한 발 한 발 가르쳐야 하는 아프고 고단한 삶의 여정을 그려본다.
봄이는 태어난 지 3주 만에 많은 것들을 잃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봄이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할 수 없는 것까지 해 내야 하는 날들은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든다.
남들과 다른 아이를 키우며 나를 외톨이가 되었고 예상치 못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속은 썩어 고약한 냄새로 가득했다. 역겨움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돼서야 아이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봄이는 세 살에 걷기 시작했고, 모든 발달은 하염없이 느렸다. 자극을 찾아 스스로 발달하지 못하고 치료를 통한 적극적인 자극을 통해 힘겹게 따라갔다. 발달 속도는 점점 더 느려져 영구 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다. 국가가 인정하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봄이의 어린 시절 나는 정신병자와 다름없었다. 병원을 찾지 않았을 뿐 분명 마음은 병들어 있었다. 아이가 받는 천대를 받아내고 이겨내야 했던 지난날들은 상처로 가득했다. 자존감은 땅속 깊이 파고들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소소하고 작은 일에도 기쁨을 느낀다. 나는 봄이가 내게 기쁨을 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며 봄이 어릴 적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꼬마 봄이를 안고 밝게 웃는 낯선 내 모습에 놀랐다.
분명히 힘겨운 날들이었다. 그저 고통으로만 가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 묘한 감동이 나를 감싸며 속삭인다.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거야. 당신에게 주는 상이자 위로의 선물이야.'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누구에게든 힘든 일이다. 아이를 키우며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통해 어른이 되고 성숙해져 간다. 부모의 마음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함께 울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위로를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아픔을 이겨내고 밝게 빛날 때 위로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다. 나의 고통이 누군가의 위로가 된다면 기꺼이 꺼내 보이리라.
슬픔만 있다면 울다 지칠 테니 좋은 곳에 가 닿을 수 있도록 고민하며 글을 써 내려가려고 한다. 비극에서 시작하지만,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슬프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결이 고운 글을 써내는 욕심을 부려본다.
그림이나 공예 작품을 정교하게 다듬다 보면 완성되어 가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지겨운 퇴고 과정을 거치며 온 뼈마디가 하나로 굳어 버릴 것만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몰입하는 이 순간만큼 미치도록 행복하다.
진솔함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다. 계획은 청산유수지만 실력은 미약하니 걸작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도 품고 있던 원석을 꺼냈으니, 보석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장황하게 뱉어 놓은 말들로 책임감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이 순간과 글을 쓰는 모든 순간을 즐겨 보려고 한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준비가 됐는가? 당신에게 깊은 감동과 위로가 있기를 기도하며 글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