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아니고 봄이 엄마로 살기 (봄의 왈츠)"
어머니가 대구로 내려가신 뒤 다시 아이와 둘 뿐인 생활이 이어졌다. 남편과 으르렁대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고립된 생활과 불화는 우울증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했다.
자살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파트 7층에 살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설프게 살아났다가는 더 큰 고통에 처할지도 모른다.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머리는 깨지고 뼈는 다 으스러질 것 같은데?"
바닥에 떨어졌을 때의 엄청난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낼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어릴 적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다. 일곱 살 때의 일이다. 엄마는 물을 가득 채운 대야에 쥐가 든 덫을 통째로 담갔다. 잡기는 잡았는데 처리할 방법이 없으니 익사시키려는 것이었다. 나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 오만상을 찌푸리며 쥐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건져줄까 말까 고민했다. 불쌍하지만 사람에게 해롭다니 구해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보지 말라면서 쥐덫 위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올려놓고 가버렸다. 물속에 잠긴 쥐는 다급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하고 물을 들이켜는 순간 허파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물 밖으로 뽀글거리며 올라왔다. 물을 계속 들이켜며 쥐는 죽어갔다. 나는 왜 그 잔인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지켜봤다기보다는 차마 떠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생각된다.
열네 살 때 아빠는 바닷속에서 돌아가셨다. 발목이 밧줄에 감겨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닷물을 들이키며 돌아가셨다. 대야 속에서 죽어가던 쥐처럼 말이다.
나는 분명 내 의지로 쥐의 익사 장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에 충격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아빠의 죽음에 쥐의 익사 장면이 더해져 물에 대한 공포와 죽는 순간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죽음이 두려워 쉽게 저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으니 '죽으면 끝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지 정말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살고 싶었다. 행복하게 말이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면 죽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내가 죽으면 애는 어떻게 하지?'
'애를 안고 뛰어내리면 살인이겠지?'
'나 혼자 죽으면 장애가 있는 우리 애는 죽음보다 못한 인생을 살게 될 텐데...' '아이를 살리자고 내가 산 송장처럼 살아야 하나?'
뭐든 옳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실천은 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는 것이다.
아이를 살려달라 울부짖었던 내가 이제는 내 목숨을 두고 답도 없는 고민을 반복하고 있었다.
스물네 살 때 일이다. 신용이 좋지 않았던 남자 친구가 내 명의로 사업을 했다. 그는 내게 빚더미를 남기고 도망갔다. 매일 살벌한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수면제 30알이면 죽을 수 있다길래 약국 세 곳을 들러 30알을 만들었다. 그리고 술과 함께 삼켰다.
영원히 잠들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몇 시간 만에 깨어났다. 눈앞은 빙빙 돌고 몸은 가눌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공포가 밀려오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에게 연락했고 그의 등에 업혀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위세척하다 또 죽을 뻔했다.
위 세척은 위내시경처럼 긴 관을 위까지 넣고 엄청난 양의 물을 부어 위를 세척하는 것이다. 물이 위 안에 가득 차면 입 밖으로 흘러넘쳐 먹은 약도 물과 함께 흘러나온다. 의식이 있었던 나는 의료진의 말이 들렸다.
위 세척 중 물을 들이켜면 폐렴에 걸릴 수도 있다고 뭐라 뭐라 떠들며 코로 숨을 쉬라고 했다. 그들은 팔다리를 꽁꽁 묶어 고정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위에 물이 가득 차고 물이 입 밖으로 흘러넘치자 금세 코가 막혀 버렸다. 눈물이 콧물 되도록 울다 보면 코가 막히는 것처럼 코가 꽉 막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의사는 뭘 알고 사람을 살리겠다고 덤비는 것인지.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놈이니 진짜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약에 취해 눈도 뜨지 못하는 주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의사 놈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런 상황을 대비해 의사 놈은 미리 팔다리를 묶어 놓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멍청한 의사 놈 때문에 위 세척하다 익사할 판이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던 익사였다. 차라리 숨 막혀 죽더라도 익사는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숨을 참기 시작했다. 폐활량이 적어 평소 숨을 오래 참지 못하는 나였다. 몸이 녹아내리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하다가 물고문을 당하는 거라면 명예라도 얻을 텐데 내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평소 참을 수 있는 시간의 몇 배의 시간을 참아 낸 것은 기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죽지 않고 살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수면제는 TV에서 본 것처럼 깨끗하고 편하게 죽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TV에서 수면제를 한 움큼 집어삼키는 장면이 자살용 단골 장면으로 쓰이면서 사람들의 수면제 자살 시도가 늘고 있었다. 그래서 시중의 판매되는 수면제는 독성을 줄여 만들어지고 있었다. 수면제 30알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응급실 위세척 체험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수면제 과다복용은 간에 큰 타격을 주고 근육 섬유가 녹아내리는 등의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다는 것도 간호사의 불친절한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 침대 병명에 뭐라고 적혀 있냐고 물으니, 간호사는 불친절하게 '자살기도'라고 설명해 주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의료진의 태도는 싸늘했다. 사람 살리기도 힘든데 죽으려는 놈이 괘씸하고 한심했던 모양이다. 왜 죽으려고 했는지는 그들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당시 자살기도는 의료보험도 되지 않았고 1인실을 사용했으니 엄청난 병원비 부담은 덤이었다.
이런저런 경험들로 죽는 순간이 무서운 나 같은 사람은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봄이 머리 수술 당시 기도를 들어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갈급함이 많았던 나는 남편의 동의를 얻어 교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새 가족 수료도 받고 성경 공부도 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분은 자살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살인을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은 자살을 살인과 동급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망했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되었으니, 자살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죽어서 살인자의 벌을 받느니 죽도록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 칭찬이라도 받아야겠다.
나는 죽지 않고 견디기로 했다. 그리고 사는 동안 받은 고통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따져 물어야겠다는 건방진 생각도 했다.
내가 암흑의 시간을 걷는 동안 봄이는 어느새 걷고, 뛰고, 아주 낮은 점프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우울증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즐거운 것을 찾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영화였다. 대학 시절 감상문 발표를 했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다시 보게 되었다. 주인공 남녀가 '쇼스타코비의 왈츠 2번' 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왈츠는 모르지만 영화에서 나온 단순한 스텝은 따라 해 볼만했다. 혼자 하려니 흥이 나질 않는다. 파트너가 필요했다.
"새봄아! 엄마랑 춤출까?"
"응!"
"자! 이렇게 손을 잡고~ 엄마 따라서 발을 움직이면 되는 거야~"
"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와~ 아하하하하!"
"어! 그렇게 뒤로 넘어가면 다쳐! 자~ 이렇게 돌고~ 돌고~ 돌고~ 돌고~ 할 수 있겠어?"
"몰라!"
"다시 해보자~ 엄마 손 잡고~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빠 바바밤~ 빠바 빠바바 빠바~ 빠밤~ 돌고~ 돌고~ 엄마 따라서 돌아요~"
"으하하하하!"
"재미있어?"
"응!"
"계속 출까?"
"응!"
가사도 없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봄이의 손을 잡고 뱅글뱅글 돌았다. 엄마와 추는 왈츠가 재미있다며 봄이는 제멋대로 돌다가 발을 밟아 놓고는 또 까르르 뒤로 넘어간다.
'그래... 우리 이렇게 춤추듯이 살아보자! 스텝이 엉망이면 어떠니.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으면 됐지. 우리 죽지 말고 이렇게 잘살아 보자!'
가끔 왈츠를 흥얼거리며 봄이와 춤을 추었다. 어설프고 제멋대로였지만 그래서 한 번 더 웃을 수 있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왈츠 씬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QLTJffit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