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아니고 봄이 엄마로 살기 (봄의 왈츠)"
자정이 한참 지난 새벽 4시. 교회 편집부 일로 그래픽 작업 중이었다. 피곤했고, 빨리 끝내고 자고 싶었다. 모두 잠든 조용한 새벽. 딸각거리는 마우스 소리, 또각거리는 키보드 소리만 크게 들렸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봄이가 어느새 옆에 와 서 있었다. 아직 일을 다 끝내지 못했는데 난감했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같이 누웠다. 자기 싫다며 칭얼대는 아이 옆에 누워있다가 피곤함에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뭔지 모를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아이는 두툼한 겨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불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불을 들춰보니 동그랗게 뜬 아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벌려진 입에서는 작은 거품이 터지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는 거품이 터지는 소리였다.
"새봄아!! 새봄아?? 왜 그래! 대답해 봐! 어? 새봄아!!"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자기야!! 자기야!! 일어나 봐!! 얼른!!"
"어?? 왜! 왜! 무슨 일이야??"
"새봄이가 이상해!! 숨을 잘 못 쉬는 거 같아! 눈을 뜨고 있는데 초점이 없어!!"
"어?? 뭐라고? 왜 숨을 못 쉬어??? 뭔 소리야???"
"얼른 119 불러!! 얼른!! 급해! 빨리!!!"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거실로 안고 나와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뭘 잘못 먹고 기도가 막혔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면서 눈앞이 하얘졌다. 기도가 막혔다면 1분 1초가 다급한 상황이다. 아이가 숨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채 몇 분도 되지 않을 텐데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는 죽을지도 모른다. 삼킨 이물질을 뱉어내도록 뒤에서 팔로 감싸 안고 복부를 압박하는 기도 폐쇄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으아아아!! 새봄아!! 숨 쉬어야 해!! 숨 쉬어!!"
아이는 이물질을 토해내지 않았다.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갔고 입의 거품도 더욱 심해졌다.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떨려왔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모든 장면이 0.1초 단위로 머릿속에 촘촘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오늘 내 눈앞에서 아이가 죽는구나!'
울부짖으며 계속 응급 처치를 했지만 아이는 여전했다. 애타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듯 시간은 냉정하게 흘러 3분이 지났다. 이제 큰일 났다 싶어 아이의 얼굴을 살피니 어라? 이상하다? 파랗게 질리지 않은 것이다. 숨을 쉬지 못한다면 얼굴은 파랗다 못해 검게 변할 텐데 말이다. 어렵게나마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숨은 쉬니 다행이다.
119구급차는 이미 출발했다. 구급대원은 남편에게 전화로 아이의 증상을 물었고 경기를 하는 것 같다며 응급처치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게 경기하는 거라고? 아기 때 경기랑은 증상이 다른데?"
"몰라! 일단 직접 봐야 안다는데 증상이 경기 같데!"
119구급차가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남편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추우니까 새봄이 잠바랑 신발 좀 챙겨 와!"
아직 날씨가 추운 2월 말이었다. 아이의 겉옷과 신발, 지갑을 챙겨 뒤따라 뛰어나갔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속도를 보니 더 빨리 내려가야 했다. 한 번에 몇 계단씩 뛰어내려 순식간에 1층에 도착했지만, 구급차는 이미 아이와 남편을 태우고 저만치 가고 있었다.
시내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시장 주변이라 새벽에 오가는 택시가 없다. 호출 택시도 새벽에는 전화를 받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다 일어난 복장에 슬리퍼를 신고, 옆구리에는 아이 옷을 끼고, 다른 손에는 신발을 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 뛰다가 슬리퍼가 벗겨졌다. 벗겨진 슬리퍼를 집어 들고 울면서 다시 큰길로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다 지나가는 택시를 겨우 잡았다.
"아저씨! OO 병원 응급실이요!! 빨리요! 빨리 좀 가 주세요! 애가 실려 갔어요! 빨리 좀 가 주세요!!"
구급차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가장 가까운 OO 병원 응급실로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휴대전화도 없이 나갔다. 아이의 상황을 알 길이 없다. 택시 안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도 했다.
"제발! 제발! 아무 일 없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제발!! 제발!!"
택시에서 내려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니 아이는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있고 남편은 간호사에게 고함을 지르며 욕하고 있었다. 급하게 갔는데 아직도 아무런 처치를 하지 않고 있다니... "뭐 하는 거야? 왜 치료도 안 하고 그냥 눕혀놨어?"
"이거 보세요!! 아니! 애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빨리 어떻게 좀 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경기는 원래 그래요. 별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옆으로 눕혀 놨으니까 숨은 쉴 거예요."
"경기하는 거 맞아요? 빨리 뭐라도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경기하는 거 맞을 거예요. 경기하는 아이들 많이 봐서 잘 알아요.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아닌 이상 환자 등록부터 하셔야 처치할 수 있어요. 저쪽으로 나가시면 응급실 원무과 있거든요. 환자 등록부터 하고 오세요!"
"이런 씨..."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남편은 아이의 주민번호도 모른다. 왜 욕하며 소리 지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피곤함에 지친 간호사들은 너희보다 급한 환자가 널렸다는 듯 냉정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새벽에 응급실에 갈 일이 가끔 생긴다. 그러니 응급실 상황이나 행태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처치도 하지 않고 등록부터 하라니... 분노를 삼키며 원무과로 향했다. 응급상황에서도 지갑을 챙겨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새벽 응급실에는 교통사고로 실려와 위중한 환자부터 싸우다 머리가 깨져 경찰과 함께 온 시끄러운 주정뱅이까지 제각각이었다. 침대마다 심장 박동기가 뚜뚜 거리며 돌림노래를 하고 있었다. 쓰러져 의식 없는 노인은 자가 호흡을 하지 못하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중년의 자식들도 보였다. 하필이면 유독 응급실이 붐비는 날이었다.
경기를 잠재우는 주사를 맞고 봄이는 금세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자는 아이를 침대째 끌고 가 MRI와 엑스레이를 찍었다. 응급실 의사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아니었기에 정확한 진단은 외래로 들어야 했다. 몇 시간 뒤 잠들었던 아이가 깨어났다. 외래 예약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2시였다. 봄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새벽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이가 죽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너무 멀쩡해 보이는 것이 더 불안했다. 이렇게 멀쩡할 거면서 왜 거품을 물고 넘어갔는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외래로 신경외과 진료를 받고 소아청소년과 진료도 받으며 뇌파 검사를 여러 번 했다. 경기가 아닌 발작성 뇌전증(예전 병명 : 간질)이었다. 의사는 발작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습관성 발작이 되고 평생 이렇게 살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발작하는 동안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 지능은 점점 떨어지게 되고, 쓰러질 때 다치거나 뇌진탕이 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니 기도 확보가 중요했다. 발작 시간도 단축하려면 최대한 빨리 응급실에 도착해야 한다.
중학생 3학년 때 간질을 하는 친구가 같은 반에 있었다. 그 친구는 장애인은 아니었지만, 지능은 떨어졌고 간질 발작을 자주 했다. 이미 습관성 발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 중에 발작을 일으키면 차가운 마룻바닥에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비틀며 경련했다. 선생님이 친구를 양호실로 옮기면 우린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을 했다. 발작이 풀리면 친구는 조퇴를 시킬 뿐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부모도 교사도 이미 불치병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착했지만, 친구가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한 살 어린 여동생이 경계 가득한 눈을 하고 씩씩한 척 언니를 챙기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그때 그 친구가 했던 간질(발작성 뇌전증)을 우리 아이가 하고 있다니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남들은 겪지도 않는 일을 나는 왜 이리도 많이 겪고 사는 것일까?
봄이의 발작은 점점 더 빈번해졌다. 주로 막 잠들었을 때나 새벽에 발작을 했다. 아주 피곤했던 어느 날 밤에는 목욕하고 나오자마자 어지럽다며 그대로 쓰러져 발작을 했다. 약간의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
아이의 의식을 붙들려고 구급차에서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새봄아! 어지러워??"
"네!"
"새봄아! 내 말 들려?"
"네!"
"너 이름이 뭐야?"
"김새봄."
"새봄아! 너 몇 살이지?" "......" "새봄아!! 내 말 들려?"
"네!"
"많이 어지러워?"
"네!"
"금방 병원에 도착할 거야. 조금만 참아!" "......" 의식이 약간 있을 때 아이는 자기 이름과 "네"라는 대답만 할 수 있었다. '응'이 아닌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니 엄마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머릿속에 흐르는 뇌파로 인해 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는 것인지, 생각이 어려운 것인지, 대답을 하기 힘들 만큼 심각하게 어지러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에게 물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분명 충격적인 상황인데도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늦은 저녁 외식을 하고 후식으로 준 사과를 먹고 소화가 되지 않았던 날 밤, 어린이집 선생님의 가벼운 장난으로 깜짝 놀랐던 날 밤, 어린이집에서 점심 약을 깜빡하고 빼먹은 날 밤에도 발작을 했다.
어린이집 점심 메뉴로 김치볶음밥이 나온 날이었다. 매운 것에 민감했던 봄이는 유독 김치를 싫어했다. 선생님은 먹지 않고 앉아 있는 봄이를 혼냈고 우는 아이에게 김치볶음밥을 모두 먹게 시켰다. 그날도 봄이는 발작을 일으켰다.
응급실에서 찍은 복부 엑스레이를 살펴보니 위 속에는 소화되지 않은 김치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봄이는 먹기 싫은 것을 먹으라 하면 씹지도 않고 삼켜 버렸다. 위 속에 음식이 오래 머무르게 되면 그런 날은 영락없이 발작을 일으켰다. 꼭꼭 씹어 먹으라 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다섯 살의 첫 발작 이후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수도 없이 실려 갔다. 익숙한 증상이니 대처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자다가 갑자기 발작해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매 순간 내 귀에서는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응급실에 실려 가는 상황들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물지도 않은 상처에 계속 칼질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아주 작은 소리로 발작한다. 깊이 잠들면 발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30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아이를 살폈다. 조금 길게 잤다 싶으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 아이를 살폈다. 아이 옆에 바짝 붙어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매일 쪽잠을 잤다. 가시밭 위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코골이가 심한 남편은 다른 방으로 보냈다. 아이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편하고 잠을 자다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뛰어왔다.
남편은 일 년 정도 술을 마시지 못하고 칼퇴근을 해야 했다. 언제 응급실로 뛰어야 할지 모르니 취할 수 없었다. 술고래에게 금주는 가혹한 일이었지만 매일 선잠 자는 사람도 있는데 술타령을 가당치도 않았다.
발작이 계속되자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소아뇌전증 치료로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 신촌세브란스로 갔다.
뇌전증 약은 워낙 독해서 소량으로도 민감하게 반응하니 약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 가지 약을 같이 먹는데 먹던 약은 조금씩 줄이고, 새로운 약은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늘려야 했다.
약이 완전히 바뀌자, 발작의 횟수가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약은 강력한 만큼 부작용도 컸다. 뇌의 모든 기능을 억제하는 약이라 뇌 발달에 상당한 지장을 미친다. 아이는 항상 피곤했고 약기운에 눌려 온순하고 소극적인 아이가 되었다. 머리 위에 커다란 돌덩이를 이고 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발작을 계속하게 두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피곤, 스트레스, 음식, 운동, 생활의 많은 부분을 조심해야 했고, 약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알람을 맞추고, 계속해서 바뀌는 약의 양과 횟수를 맞추기 위해 수첩에 일일이 기록했다.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독하고 완벽해져야 했다.
몇 달에 한 번씩 먼 거리를 오가며 정기적으로 뇌파검사와 진료를 했다. 발작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가까운 응급실에 갔다가 급하게 세브란스 진료 예약을 잡았다.
발작 횟수가 줄어 한동안 뜸하더니 여섯 살의 가을날 새벽에 또 발작을 했다. 그날은 유난히 모든 것들이 힘겹게 느껴졌다.
119구급차 운전자는 새벽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온다며 사이렌을 켜지도 않았다. 차도 없는 도로에서 신호를 다 지키며 천천히 가는 꼴을 보다 못해 운전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응급실에서 발작을 잠재우는 주사를 맞고 코를 골며 잠든 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에 골지 않던 코를 고는 이유는 고단해서가 아니다. 발작으로 경직됐던 몸이 약에 의해 급격히 이완되면서 코를 골게 되는 것이다.
병원 사람들이나 119 구급대원들도 상습적으로 발작하는 환자에게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나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해질 수 없었다.
남들은 심장이 터질 듯한 순간을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들 텐데... 나는 매 순간 쓰러 질 것만 같은 충격을 견디며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응급실 밖으로 혼자 걸어 나와 주차장 화단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남편도, 부모 형제도 나의 고통을 온전히 알지 못했고, 누구도 대신 감당해 줄 수 없었다.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린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소리 내 울다가 하늘을 향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제 제발 그만!! 그만 좀 하게 해 주세요!! 네?? 하나님!! 이제 못 견디겠어요!! 제발!! 제발 좀... 그만하게 해 달라고요!! 으아아아아아아!!!!!!!"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요. 언제까지 견디라는 거예요? 도대체 왜!!!!! 왜!!! 이런 시련을 내게 허락하시는 거냐고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만하게 해 달라고요... 제발!!!"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원망이었다. 기도였지만 기도 같지 않은 울부짖음이었다.
처절한 기도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봄이는 이후로 발작하지 않았다.
3년 동안 발작이 없었고 약을 서서히 줄여 드디어 6년 동안 먹던 약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뇌파검사와 진료도 점점 간격을 두다가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치료를 종결하게 되었다.
봄이가 마지막으로 실려 갔던 여섯 살의 가을날 내 뱃속에는 둘째 아이가 있었다.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임신 7개월에 응급실 밖에서 목 놓아 울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