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아니고 봄이 엄마로 살기 (봄의 왈츠)"
대구에서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남편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봄이가 아프고부터 남편은 친구들과의 연락을 다 끊으라고 말했다. 아이가 아픈데 시시덕거릴 정신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남편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아이에게 집중하려고 연락처를 바꾸고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이에게만 매달려 살았다. 매일이 전력 질주였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만 바라보며 사는 것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눈 돌릴 틈도, 숨 고를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더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계속 다그치기만 했다. 하지만 환기 한번 시키지 않는 마음에서 피어난 곰팡이는 나를 병들게 했다. 가끔 친구들과 웃고 떠들 수 있도록 내버려뒀다면 우울증과 친구 먹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날이 갈수록 우울증은 심해졌다. 남편은 그제야 직장을 다니며 잠시라도 아이와 떨어져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월급이지만 전부 드릴 테니 아이를 봐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오전에 아이의 재활치료를 하고 오후에 일하는 조건으로 지인의 회사로 출근했다. 사장과 나 둘뿐인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했지만 잡다한 일을 했다.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하는 20분이 달콤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혼자만의 시간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잠깐의 호흡을 위해 물 위로 올라온 고래처럼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내 생일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야야 생일이 뭐 별기가? 나가서 밥이나 묵으믄 된다!"
어릴 적부터 딱히 축하를 받아본 적 없던 나나 생일을 특별한 날로 여기지 않았던 남편이나 같이 지내면서 서로 챙긴 적 없는 생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은 항상 있었다. 오늘은 외식이라도 하는구나 싶어 기분 좋게 아이를 업고 가까운 갈빗집으로 갔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봄이는 상을 붙잡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놀았다. 세 살의 봄이는 아직도 걷지 못하고 기어다니다 물건을 잡고 일어나 게걸음을 하는 정도였다.
손님이 없으니, 아이가 돌아다니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빈 상위에 수저통을 발견한 봄이는 뚜껑을 열어 수저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참 싱크대를 뒤지거나 서랍을 열어 물건을 탐색하고 어지럽히기 좋아하던 시기였다. 심심한데 때마침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했다고 신이 났다.
나는 수저를 꺼내지 못하도록 수저통을 한쪽으로 숨겼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봄이는 다른 상으로 옮겨 가 또 다른 수저통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음식을 들고 들어오던 아주머니는 수저통으로 장난을 치는 봄이를 발견하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수저를 이렇게 다 꺼내 놓으면 어떻게 해???
다른 사람들이 쓰는 건데 이렇게 꺼내 놓으면 다 다시 닦아야 되잖아!! 아우 짜증 나!!"
아주머니는 매몰차게 수저통을 빼앗고 꺼내진 수저는 바구니에 세게 던져 넣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미안한 마음에 꾸벅 인사를 하고 아이를 옆자리로 끌어 앉혔다.
아주머니의 눈총을 알 리 없는 봄이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또 기어가 상을 붙잡고 일어나 신나게 게걸음을 했다. 봄이를 한참 쏘아보던 아주머니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허! 참나! 아니~ 다 큰 애가 왜 걷지도 못해? 아기도 아닌데 기어다니네? 어이구! 참나!"
아이는 뭘 모르니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대로 챙기지 못한 어른에게 잘못이 있다 치자! 하지만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가며 부모 가슴에 못을 박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이를 흘겨보던 아주머니는 조금의 미안한 기색 없이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먼저 먹으라며 봄이를 업고 일어났다.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갈 리 없었다. 아무 말 없이 허기만 달래고 갈빗집을 급하게 나왔다.
200미터도 되지 않는 집으로 오는 길이 멀기만 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참았던 눈물을 터졌다.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생일이라서 더욱 서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눈물을 훔치고는 아무 말 없이 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셨다.
이후로도 종종 비슷한 일을 겪었다. 사람들은 "어머! 재는 왜 저래?"라고 쉽게 말을 뱉었다. 걷지 못해서 이상하고 머리가 커서 이상하다고 오래 쳐다보며 지나갔다. 자기 행동이나 말이 상처를 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봄이는 커서도 누군가의 빈정거림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픔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남편은 아이를 위해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며 새벽까지 일을 했다. 혼자서 울고 있는 나를 보면 모른 척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외침은 자신을 향한 불만으로 여겼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 사소한 일로도 다퉜다. 우리의 대화는 늘 싸늘했다.
어머니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같은 집에서 살면서 싸우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눈치 없는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시면 노인대학이나 노인정을 다녀 보시라고 권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지켜보다 못 한 어머니는 결국 참고 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셨다.
"니는 봄이한테 하는 기 반에 반만 느그 남편한테 하믄 안 되긌나? 아한테는 그리 정성이믄서 와 남편한테는 그리하는 기고??"
어머니는 내가 남편을 무시한다고 했다. 자초지종은 따져보지도 않고 자식 편만 드는 것이 서운했다. 나는 발끈하며 대꾸했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서 화가 난 거라고...
가부장적이고 절대적인 위계질서에 익숙한 어머니는 경상도 대구 토박이다. 본인의 상식으로는 며느리의 대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고 결국 회사에 있는 아들에게 울며 전화했다. 남편은 나름 효자다. 그러니 무조건 어머니 편이다. 일찍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은 외투도 벗지 않고 나를 옥상으로 끌고 갔다.
"내가 가서 엄마한테 니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고 할 거니까! 좀 있다가 내려와서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해!"
"싫어! 나는 내 하소연을 한 거지 말대꾸를 한 게 아냐! 며느리는 찍소리도 하지 말라는 거야?"
"그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라고!"
"몰라 나도!"
"애가 한바탕 울더니 갑자기 변했다고 할 거니까! 그냥 내 말대로 해! 방법이 없잖아!"
"웃기시네! 드라마도 그렇게는 안 쓰거든? 무슨 사람이 한바탕 운다고 갑자기 변해? 자기는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해?"
"아! 엄마 화 많이 났는데 그럼 어떻게 해! 시키는 대로 해 그냥!"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화살이 왜 또 나한테로 돌아와? 지금 여기서 또 싸우자는 거야? 어?
아 몰라! 내가 먼저 내려가서 얘기할 테니까. 좀 있다 내려와! 알았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남편이 시키는 대로 어머니 앞에 가서 잘못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다. 그리고 짐을 싸 들고 대구로 내려가셨다.
며느리도 자식이랑 똑같이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당하는 꼴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딸 같은 며느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니었다.
신혼 때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노안으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는 둘째 며느리에게 편지를 읽어 달라 부탁했던 모양이다.
둘째 형님은 자기도 어머니에게 편지 쓰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거 다 소용없더라고 말했다. 능력 없는 아들에게는 뭐라 한마디 안 하면서 며느리에게는 아껴 쓰라는 타박만 한다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 넷 키운 것보다 내가 봄이 하나를 더 힘들게 키운다고 하셨다. 그래서 셋째 며느리가 안쓰러웠는지 유독 내게는 너그러우셨다. 말대꾸 사건 이후로 서먹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예전같이 대해 주셨다.
"점쟁이가 느그들은 둘 다 똑똑해가 잘 산다 카드라! 고마 내는 걱정 안 한다. 느그들끼리 잘 살믄 된다."
평소 나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좋아했다.
"야야 형제들끼리는 다 그렇게 하는 기다."
"형님한테 수고했다 전화해야 안 쓰겄나? 아랫사람이 먼저 그리하는 기다!"
어머니는 혼내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다. 위계질서를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쳐 주셨다. 다 큰 어른인 나에게 모른다. 타박하지 않고 아이 가르치듯 조용히 타일렀다.
나는 어릴 적 정 없는 친척들과 한마을에서 살았다. 아빠는 밥상머리에서도 윽박지르며 혼내는 사람이었고 곰 같았던 엄마는 방임 육아를 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형제들은 눈치껏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남편 친족 사람들의 형식과 질서가 부담스러웠지만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질서의 중요성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시아버지는 남편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아빠가 돌아가셨으니, 엄마와 어머니는 홀로 지낸 시간이 비슷하다.
어머니는 남편이 죽고도 제자리를 지켰다. 김씨 집안의 제사를 지내고,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없는 살림으로 아들 넷을 키웠다. 먹고 사느라 힘들고 바빴을 텐데 부지런히 훈계하며 애정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경상도 특유의 억센 말투에 아들 넷을 키우느라 목소리가 커졌을 법도 한데 어머니의 말투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어머니는 봄이를 다른 손주들과 똑같이 예뻐하셨다. 다정한 말투로 아이와 놀아주고 부족함은 이해하고 오래 기다려 주셨다. 자기 핏줄이니 더욱 위했겠지만 나는 봄이를 향한 어머니의 온전한 사랑이 고마웠다.
어머니는 봄이가 여섯 살일 때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6개월 항암치료에도 간으로 전이되었다. 우리 집에 둘째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는데 손주를 그리 예뻐하시던 어머니는 둘째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봄이는 12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억한다. 부모조차 아파하느라 온전히 예뻐하지 못했던 장애가 있는 손녀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셨던 어머니는 봄이에게도 가장 따뜻했던 사람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