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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엣지

소설 [이상한 목공방 2]

by 온벼리

안녕 엣지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던 엣지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엣지도 이제 노견이다. 처음 집으로 왔을 때도 열세 살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두 번이나 버려졌던 녀석을 적응시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할아버지가 되어도 엣지는 여전히 까다로운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양치질을 싫어하고 입을 만지는 것도 싫어하고 발을 씻는 것도 싫어한다. 외출하고 들어오면 목욕은 못 할망정 발은 씻어야 할 것 아닌가. 뭐든 싫으면 무조건 으르렁거린다.

미용할 때면 금방이라도 물 것처럼 태세를 갖추고 극대노를 한다. 그러고는 이발기를 공격한다. 발톱도 깎지 않으려 한다. 참 유난스럽다. 분리불안에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에 공격성까지 갖추고 불만은 오줌 테러도 표현하는 못된 놈이다. 파양을 두 번이나 당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다행히 물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보 집사였다면 만만하게 보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초보 집사는 엣지 같은 지랄견은 키우지도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어느 날은 양치하지 않겠다며 지랄 발광을 하는 녀석에게 실내화를 치켜들었더니 극도로 예민해져서는 피가 나도록 자기 꼬리를 물어뜯는 것이 아닌가. 역시 정신상태가 온전한 놈은 아니다.


엣지를 보면 가끔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였다. 하지만 약삭빠른 아이는 아니었다. 싫은 것은 왜 싫은지 설명하지 못하고 울며 떼를 썼다. 엄마는 내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귀찮고 시끄럽다며 매부터 들었다.

마음을 속 시원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고 존중은커녕 별것 아닌 존재로 취급을 받는 것이 서러웠다. 작고 힘없는 꼬맹이는 매 맞지 않기 위해 적응해야 하는 것이 적자생존의 법칙 아니겠는가. 반항심은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으르렁대는 것은 엣지의 싫다는 표현이었다. 싫다는 놈에게 오히려 위협적인 대응을 했던 나는 엄마와 다를 게 없었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던 내가 아닌가. 그제야 무조건 꺾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싫은지를 알아보려는 노력과 배려와 적절한 훈육이 필요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엣지의 마음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네게도 싫으면 싫은 이유가 있겠지! 아무 이유 없이 싫다 해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니 그것 또한 존중해 줘야겠지! 뭐든 억지로 누른다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양치는 덴탈껌과 스케일링으로 관리해 주고, 발톱은 직접 깎지 않고 사포 스크래쳐를 이용하도록 유도하고, 미용은 며칠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진행하기로 했다. 산책도 자주 다니고, 외출할 때면 노즈워크에 간식을 숨겨두어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엣지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분리불안은 줄고 화낼 일도 줄어드니 눈빛은 온화해져 갔다. 산책 후 발 씻는 것도 거부감이 줄었다. 가끔 강아지처럼 칭얼대며 귀여운 척도 한다. 안아주면 아기처럼 안기고, 늘 아빠 옆자리만 고수하던 녀석이 이제는 내 옆에서 잠을 잔다. 식구가 많으니, 질투는 여전하다. 품에 안겨있는 베키를 보면 뚫어질 때까지 째려보기도 한다. 그래도 이제는 사랑스럽다.

어느새 정리 들었는데 암이라니...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검사와 첫 번째 항암치료가 있는 날이다. 뒤늦게 운전을 배워 아직 초보 딱지도 떼지 못했는데 나 홀로 서울 운전이라니. 엣지는 차만 타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내릴 때까지 칭얼댄다. 그런 녀석을 태우고 혼자 서울까지 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남편은 출근했고 병원은 가야 하는 것을. 이런 상황을 위해 운전을 배운 것이 아니겠는가. 두려워도 별수 없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알람처럼 옆에서는 계속 칭얼댄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직진으로 빠져나가라는 내비게이션의 친절한 음성에 "응? 직진하라는 거야? 빠져나가라는 거야?"라고 대꾸를 하고는 그냥 쭉 가던 길을 따라갔더니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라고 화답을 했다. 한강을 따라 달리는 지하도로는 뉴턴하는 길도 없다. 한참을 가서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서울은 길 한번 잘못 들면 돌아오는 것도 한나절이다. 목표 지점까지 가는 것도 힘든데 옆에서 응원은 못 할 망정 계속 칭얼대고 있으니 등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어깨와 팔다리는 점점 굳어간다. 정신은 점점 혼미해지고 이러다 유체 이탈이라도 경험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쯤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


검사 결과 암은 이미 폐로 전이되어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운전 그까짓 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전 울며 겨자 먹기로 비를 맞고 죽어가던 유니라는 고양이를 구하게 되었다. 당뇨병에 걸린 유니는 구조 당시 심각한 상태였다. 얼마 못 살 걸 같았다. 마지막이라도 편하게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녀석을 돕기 시작했다. 공방에서 돌보며 치료하러 다녔다. 치료비는 어마어마했다. 유니를 신경 쓰느라 다른 녀석들은 뒷전이었다.

때마침 코로나가 닥쳤다. 일은 줄고 한가했지만, 수입은 반토막이 났다. 유니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도 다시 살아났다. 녀석의 삶의 의지는 대단했다. 그러니 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니를 신경 쓰느라 엣지가 아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엣지는 3주에 한 번씩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한번 가면 며칠을 입원해야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엣지는 밥을 먹지 않는다. 병원에 버려졌던 기억이 있으니 더 그렇다.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허겁지겁 사료부터 먹는다. 평소 같으면 사료에 캔을 비벼주지 않으면 먹지 않는 녀석인데 캔을 비빌 새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 댄다. 내내 굶었으니 배가 얼마나 고팠을까. 그렇게 배고프면 병원에서 주는 사료를 먹으면 좋으련만 어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병원에서 돌아온 날에는 유난히 깊은 잠을 잔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버틴 모양이다. 그런 녀석이 한편으론 또 안쓰럽다.


항암치료를 받고 오면 처방 약을 먹여야 하는데 지랄견에게 약 먹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전쟁을 방불케 한다. 억지로 먹이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구슬리는 것도 통하지 않을 테니 속이는 방법밖에 없다. 약을 츄르에 섞어서 먹였다. 몇 번은 먹는가 싶더니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냄새만 맡고도 팽 돌아선다. 캡슐에 넣어 닭가슴살에 돌돌 말아 주었더니 닭가슴살은 쏙 빼먹고 캡슐만 퉤!! 뱉어낸다. 요리조리 숨겨서 먹여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똑똑한 것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불쌍하다가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참 어려운 녀석이다.




봄비가 내리던 날 비에 젖은 미애가 공방을 찾아왔다. 철이가 없는 미애가 유난히 더 외로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둘 중 한 놈이 먼저 갈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름 지을 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 괜히 철이와 미애라고 지었나 보다.


유니는 공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병원도 다녀야 하고 인슐린 주사도 직접 놔주어야 한다. 유니로 인해 많은 후원자가 생겼다. 어느 후원자는 고양이들 먹을 사료와 간식을 보내주기도 한다. 물건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다. 엣지의 사연을 보고 반려견 카시트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가격이 제법 비싸 위시리스트에만 담겨있었던 카시트였다. 병원 가는 길에 사용해 보니 효과가 좋다. 엣지는 편안한지 칭얼대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는다. 덕분에 병원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두 번의 항암치료 후 종양의 크기가 3mm 줄었다. 하지만 심장병에 척추와 폐와 신장까지 나빠졌다. 엣지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암 투병 8개월 만에 엣지가 죽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유니가 죽었다.

사람보다 수명이 짧은 녀석들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정든 존재와의 헤어짐은 매번 슬프고 아프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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