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구석 E열 Apr 28. 2020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할 수는 없듯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할 수는 없듯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2017.



물의 형태는 항상 바뀐다. 정해진 것이 없다. 물의 모양이 컵에 담긴 원통형이라고 한정 지으면 나머지 물의 모양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라는 제목의 뜻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다양한 캐릭터를 사용한다. 고아이자 언어장애인인 엘라이자, 엘라이자와 마찬가지로 말단 노동자 흑인인 젤다, 대머리 동성애자 노인 자일스, 소련에서 온 스파이 호프스테틀러 박사,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고 권위적, 마초적인 스트릭랜드, 거기에 치유능력을 가진 양서류 인간까지 나온다. 델 토로 감독은 그만의 연출력과 상상력으로 이들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은 주제를 대놓고 드러내기 바쁘다.


차별 발언을 입에 달고 살면서 성공에 집착하는 스트릭랜드는 주인공과 대립한다. 엘라이자를 주축으로 한 주인공 측은 모두 소수자, 약자이다. 감독은 정말 대놓고 주제를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작위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60년대라는 배경은 그들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한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극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곳이라는 것도 생각해본다면 스트릭랜드의 성격마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배경에서 작품은 엘라이자의 모든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일상에 녹아들고 엘라이자에게 공감하며 이어서 양서류 인간에게까지 공감하기 시작한다. 이 괴물은 누군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자신도 공격하지 않는다. 실수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치유해준다. 여기 있는 괴물은 순수하고 사랑할 줄 아는 존재이다. 하지만 사회는 핵무기를 겨누고 폭언을 일삼는 괴물 같은 곳이다. 스트릭랜드는 단순 악역이 아니라 차갑고 폭력적이던 60년대를 대표한다.




엘라이자와 괴물은 사랑에 빠지고 다른 모든 인물들 또한 제각각 사랑의 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배경인 60년대는 사랑은 하지 않으면서 그 모양을 한정 짓는다. 또한 백인 남성을 이상적인 표준으로 내세운다. 표준을 정함으로 표준에 맞지 않는 나머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는 이를 비판한다. 30분을 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솔직한 주제이다.


영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골동품’이다. 골동품에 대한 대사는 자일스가 한다. 그는 영화 포스터를 그리면서 먹고 산다. 60년대부터 이미 사라져 가던 직업이다. 작중에도 담당자에게 퇴짜를 맞는다. 괴물 또한 정확하지는 않지만 종의 마지막 개체로  나온다.


자일스는 사라지기 직전인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우린 골동품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 골동품들은 결국 해낸다. 또한 달력을 뜯을 때 ‘시간은 과거로부터 흐르는 강물에 불과하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감독은 아무리 골동품이라 하더라도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모든 이야기 근처엔 물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엘라이자는 괴물을 만나고부터 욕조 속이 아닌 욕실 가득 물을 채우고 사랑을 나눈다. 우연인지 바깥에도 비가 내린다. 두 물방울이 하나가 되는 연출에 이어 결말에서는 둘이 바다에 들어간다.


혼자였던 엘라이자와 괴물이 만나고부터 플라토닉과 에로스라는 사랑의 모양을 부끄럼 없이 보여준다. 종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엘라이자의 목에 난 상처가 아가미로 변하는 모습은 괴물의 능력이라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다른 판타지 동화처럼 사랑의 힘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마지막 내레이션에 나오는 시처럼, 사랑의 모양은 물과 같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