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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E열 Apr 30. 2020

메시지를 담기엔 로맨스가 너무도 달았다

영화 <목소리의 형태>

메세지를 담기엔 로맨스가 너무도 달았다

<목소리의 형태>, 야마다 나오코 감독, 2016.



 

왕따, 그러니까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 대부분은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수년이 흘러 겉에서 티가 나지 않더라도 완벽히 잊지는 못한다. 왕따로 인해 바뀐 성격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그때의 기억이 PTSD가 되어 괴롭게 살기도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왕따라는 무거운 주제를 들고 나쁘지 않게 처리했다.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할 때 으레 있을 법한 ‘가해자 미화’는 없다. 초등학교 6학년, 청각장애인인 니시미야 쇼코를 괴롭혔던 이시다 쇼야는 영화 끝까지 반성하고 사과한다. 가해자라는 낙인이 찍힌 쇼야는 대인기피증을 앓기까지 한다. 다만 작품의 문제점은 가해자 쇼야가 아무닌 피해자 쇼코에 있다.    

 

쇼코는 처음 괴롭힘을 당할 때부터 사과만 한다. 실제 집단 따돌림 피해자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작품은 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자기혐오에서 나온 사과인지,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한 사과인지 알 수 없다. 쇼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한다. 관계가 풀어진 상황에서도 일관적으로 사과만 하는 쇼코의 모습은 원래부터 ‘착하다’, ‘보살이다’ 같은 표현이 어울린다. 가해자를 만난 상황에서 잠깐 당황하는 것으로 끝나는 피해자의 모습은 용서를 바라는 가해자의 희망에 가깝다. 이러한 의문은 쇼야에게 고백하려는 장면에서 더욱 심해진다. 쇼코는 ‘가해자가 원하는 피해자의 상’이다.




쇼야와 쇼코의 연애는 무겁고 어두울 수 있던 내용을 대중적으로 이끈다. 작품의 뼈대는 성장보다 로맨스 서사에 가깝게 진행된다. 작품의 시점은 쇼코와 약간의 거리를 둔다. 쇼코의 심리적 갈등은 쇼야에 비해 빈약하게 묘사된다. 그로 인해 쇼코는 그저 항상 착하기만 한 인물로 전락한다.


심리 묘사가 부족한 쇼코의 자살 시도는 ‘어째서?’라는 의문을 남긴다. 본인 옆에 있으면 불행할 것이란 이유는 설득력이 한참 부족하다. 결국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쇼야와 자기혐오를 이기지 못한 쇼코의 대비는 보이지 않는다. 하이라이트여야 할 장면은 흐릿하게 지나간다. 초석을 잘못 놓은 결말부의 재회는 어쩔 수 없이 유치하고 맥 빠지게 비춰진다. 누군가에겐 감동을 깨고 오글거림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목소리의 형태> 원작 만화는 7권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때문에 작품도 애니메이션 치고는 매우 긴 러닝타임을 갖는다. 그러나 2시간 9분마저 부족했던 건지 많은 요소가 잘려나갔다. 등장인물의 수는 변하지 않았기에 캐릭터성을 잃었다. 위선적인 간접 가해자 카와이 미키는 눈치 없는 방관자가 되었다. 왕따 피해자였던 마시바 사토시는 설정이 아예 잘려나가 왜 나왔는지 모를 인물이 되었다. 극단적으로, 주인공 쇼야의 성장은 대인기피증을 극복하는 후반부의 장면이 전부다. 어린 시절의 파괴적인 일탈에 대해 사과는 하고 죽어야겠다는 다짐 정도를 포함해도 두 장면이 끝이다. 그것을 성장이라 봐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작품은 왕따와 사죄, 용서, 이해와 소통이라는 주제를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도 <목소리의 형태>는 높은 평을 받고 있고, 재미있다. ‘로맨스’라는 장르는 언제나 똑같은 감흥을 준다. 로맨스 작품에서 재미를 가르는 요소는 설정과 몰입도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이 두 가지를 매우 잘 잡아냈다. 기본적인 작품의 틀은 ‘청각 장애를 가진 소녀와 초등학교 동창의 사랑 이야기’이다. 작품은 쇼야의 시선에 집중했기 때문에 관객은 쇼야에게 몰입하고, 쇼야와 쇼코가 잘 풀어지길 바라게 된다.


조조 모예스의 소설이자 동명의 영화 <미 비포 유>도 이와 같다. 사지마비 장애인 남성과 돈 때문에 간병을 하게 된 여성은 로맨스 서사의 정석을 따라간다. 모든 걸 포기한 남성이 점점 마음을 열어가는 점, 존엄사에 대한 물음 제시 등 사회적인 주제 역시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미 비포 유>가 인기 있는 이유는 깊은 주제가 아닌 장르적 재미 때문이다. 소재의 새로움과 높은 몰입도는 관객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이렇듯 <목소리의 형태>는 남자 주인공을 메인으로 한 로맨스 장르로서 합격이다. 감독은 작품의 깊이 대신 대중성을 선택했지만, 같은 러닝타임 안에서 주제를 더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해 아쉬움이 남는다. 인물이 변화하고 극복하는 모습 대신 아픈 과거의 단상과 ‘썸 타는’ 모습이 스크린을 채웠다. 때문에 작품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가 아닌, 상황으로 만들어낸 감정에 호소한다. 울림은 있지만 아쉬움 역시 크다.  

   

쇼야와 쇼코의 감정선은 복잡하게 얽혔다기보다 심하게 출렁였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하고 상징적인 연출은 둘의 끈에 약간의 얽힘을 만들어주는 듯 했지만 주인공과 주인공의 상대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온 두 인물이 함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줄거리는 통했다.




관객은 두 인물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순탄치 못한 삶 대신 우리 삶에 녹아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 또한 장점이다. 억지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는 느낌도 별로 들지 않는다. 클라이맥스 장면 하나에서 터뜨리지 않고 후반부 내내 감정을 이어간 점은 다른 작품에서 찾기 어려운 특징이다. 작품의 큰 주제와 스토리는 서로 빗겨갔지만 그럼에도 건질 점은 남아있다.


<목소리의 형태>는 주제에 대한 수많은 단점에도 그럭저럭 볼만한 감동적인 하이틴 로맨스 작품이다. 외줄타기 하듯 명작과 망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 <목소리의 형태>는 적당히 좋은 위치에서 타협했다. 차라리 두 편으로 쪼개서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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