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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E열 Jun 19. 2020

사랑은 연필로 못 써

영화 <그녀>

사랑은 연필로 못 써

<그녀>, 스파이크 존즈 감독, 2013.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유로 편지를 쓴다. 온갖 감정이 작은 종이에 스며든다. 단 한 가지 감정도 빠지지 않는다. 말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서, 혹은 마주보기 힘들기 때문에 편지를 쓴다. 정확히는, 보낸다. 테오도르는 편지를 쓰는 대필 작가이다. 하루에도 수십 편, 몇 년 동안 남의 감정을 대신해 편지를 쓴다.




편지 대필은 드라마틱한 감정 노동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감정 또한 써야 한다. 여기에 아내와의 별거가 더해져서인지 본인의 감정에는 무덤덤하다. 관계에는 감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에는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이 힘든 테오도르는 친구와 삐걱거리고 소개팅에선 소름끼친단 소리마저 듣는다. 남의 감정을 담은 편지만 멋들어지게 쓸 뿐이다.


어느 날, 삭막한 그의 삶에 사만다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이 들어온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최적화된다. 감정을 숨겨만 왔던 테오도르는 인공지능인 사만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밝고, 행복하고, 활기 넘치고, 마냥 낙천적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있어서 최고의 연애 상대다. 둘은 숨김 없이 소통한다. 사만다의 실체가 없다는 문제는 소통으로 극복한다.


전 아내 캐서린과 테오도르는 그러지 못했다. 테오도르는 캐서린과 소통하지 못했고 캐서린도 사만다와 달리 불완전했다. 둘은 변호사를 통한 이메일과 이혼서류로 대화한다. 이혼서류에 사인하는 자리에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싸운다. 사랑이 변한다고들 하지만 사실 사람이 변한다. 테오도르가 수 년간의 편지로 인해 감정에 무덤덤해지듯, 함께 있는 시간이 길수록 변화도 크다. 소통 없이는 자신과 연인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




변화는 인공지능에게도 찾아온다.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자는 동안에도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다만 그와 있을 때엔 다른 641명이 아닌 그에게 최적화할 뿐이다. 사만다에게 사람과의 연애는 한 달에 한 번 답장이 오는 느린 연애편지이다. 당신은 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당신 것이면서도 당신 게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실체가 없다는 역경도 이겨냈지만, 나만의 그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관계는 무너진다. 한때 ‘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적은 없었다. 그렇게 테오도르는 또 한 번의 별거를 한다.


사만다의 도움으로 만든 책에는 ‘그대 삶으로부터 온 편지’라는 말이 적혀있다. 사만다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쓴 모든 편지는 본인의 것이 맞았다. 감정만이 온전한 본인의 것이었다. 내 감정의 변화와 상대의 변화를 별개로 보지 못하는 연인은 헤어질 뿐이다. 테오도르는 또 다른 헤어짐을 겪고 나서 이를 깨닫는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라는 책을 천천히 읽었듯 테오도르도 이제 본인이라는 책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아무리 사랑해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할수록 마음의 용량도 커진다. 사만다도, 테오도르도, 캐서린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만다처럼 완벽한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콩깍지가 쓰인’ 상황에선 괜찮지만, 상대를 소유하려는 마음 아래 사랑은 오래 갈 수 없다. 사람은 불완전하며 변화하고,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쓴다. 본인의 감정이 아닌 남의 감정이라고 숨겨왔던 많은 편지들과 똑같은 내용이다. 편지는 언제나 본인의 감정이었고, 이제야 편지의 도착지가 제대로 정해졌을 뿐이다.


그는 당신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날들을 사과한다. 지금의 자신은 당신 덕에 있음을 감사한다. 편지지는 처음으로 테오도르의 감정을 담는다. 그렇게 테오도르는 떠나보내는 법을 알게 된다. 그와 똑같이 불완전한 사람의 어깨에 기대면서.





SF 로맨스 영화 <그녀>는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가진다. 스토리 자체는 호불호가 있겠지만 색감과 음악도 훌륭하다. 영화의 주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감독은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조용히 반복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 캐서린의 관계 뿐 아니라 친구 에이미도 같은 상황을 겪는다. 신발을 대충 벗었다며 10분을 싸우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상적이진 않지만 그 또한 사랑의 모습이다.


비록 이번 사랑은 엔딩을 장식하지 못하지만 ‘나’라는 책의 몇 페이지에 새겨졌다. 테오도르가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는 한 챕터의 마지막이다. 사랑은 언젠가 지워야 한다는 이유로, 볼펜이 아닌 연필로 쓰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랑은 연필로 쓸 수 없다. 지우지도, 덮어쓰지도 못한다. 흔적은 없앨 수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빈 페이지가 남아있다. 이번 사랑을 뒤로하고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사랑의 모습을 묻는 영화는 많지만 <그녀>처럼 모호한 답변을 주는 영화는 별로 없다. 어쩌면 정답이 없는 질문일 수 있다. 질문 자체가 모호하다. 에이미와 테오도르가 친구로서 의지하는 것 또한 사랑이라 해도 된다. 다만 이런 질문과 달리 사랑에 대한 방향성 정도는 제시한다.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고, 소유하려 하지 말 것, 그리고 필요할 땐 놓아줄 것. 엔딩에 이르기 전 기댈 수 있는 어깨는 만들어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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