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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Nov 08. 2016

슬픔을 위로하는 건 슬픔

백영옥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엄청 오랜만에 에세이를 읽었다. 내가 스쳐지나가듯 생각했던 것들과 작가의 삶에서 얻은 통찰의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되거나, 혹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작가를 통해 생각함으로써 나의 사고가 넓어지게하는 에세이가 좋다. 백영옥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은 전자에 가까운 글이 많았다. 나도 했었던 생각을 너무나 깔끔하게 글로 정리한 것을 읽으며 페이지를 꼬깃 접고, 타이핑해두었다.


이 책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백영옥이라는 작가가 단숨에 스타가 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단에 오르기까지의 수많은 좌절,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실연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좌절을 극복해낸 성장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실패와 좌절 속에서 얻은 통찰기이기에 전반적으로 책이 따뜻하다. 


슬픔을 위로하는 건 슬픔이다. 힘내라는 위로가 아닌, 나도 이런 상처가 있다는 자기고백과 공감.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내어보이며 위로를 받는다.



크게 세 가지 주제가 마음에 와닿았다. 하나, 버티고 견디는 삶에 대한 존경. 둘,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다. 셋, 작은 행복을 자주 느낄 것. 아래는 이와 관련된 좋았던 구절을 정리해두었다. 




행복학 관련 책들을 읽다가 내가 느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적 성공, 발전적 진화, 자아성장에 과도하게 관심이 큰 탓에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에 투자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대다수의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감'을 구축해낸 사람들이다. 타인과의 보다 깊은 관계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자아 중심적인 강박이 나를 망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현재를 망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좋아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직업을 꿈과 연결시켜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좌절하게 만드는 요즘 세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직업이란 '내'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란 생각에 이르자, 사람들이 느끼는 '자아실현'과 '직업'사이의 괴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무엇보다 자아 성취는 일이 끝난 후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직업은 적어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게 맞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본래의 직업은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나는 버리고 떠나는 삶을 존중하지만, 이제는 버티고 견디는 삶을 더 존경한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다. 
함께 있을 때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지 않아도 좋은 사람. 조금 더 정확히 말해, 함께 있지 않음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은 사람이 내겐 최고의 상대다.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 않고, 숨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 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어린 시절에 생긴 결핍 때문에 평생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가장 나쁜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매튜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매튜는 '앤이 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믿고 있어'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행동을 바라본다. 매튜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도 앤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매튜의 깊은 사랑으로 결핍 없는 독립체로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매튜의 죽음에도 앤은 그토록 어른스럽게 처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다. 


 영화<봄날은 간다>

은수처럼 힘든 여자를 만났기 때문에 상우 역시 처음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의 혹독함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질문해보았을 것이다. 삶의 관문 같은 '그녀라는 세계'를 통과해 가며 스스로의 한계와 가능성 모두를 체감했을 것이다. 은수 같은 사람을 사랑해보았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누군가를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거다. 내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하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가 나쁜 사람과 종종 사랑에 빠지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일거다. 사랑이 끝나야 비로소 그 시작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처음으로 나란 사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정말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물러나야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에게 결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 말이다. 가령 상대가 너무 미워 그녀의 자동차를 긁거나, 그의 작업실 유리창을 벽돌로 박살낸 후, 사흘 밤낮을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런 짓만은 하면 안되는 것이다. 


 행복은 지속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해지는 방법은 '큰 행복'이 아니라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이라고. 


 누군가의 성공 뒤엔 누군가의 실패가 있고, 누군가의 웃음 뒤엔 다른 사람의 눈물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 실패란 없다. 그것에서 배우기만 한다면 정말 그렇다. 성공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이지만,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인 실패도 있다. 나는 이제 거창한 미래의 목표는 세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작고 소박한 하루하루.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나. 오늘도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조금씩, 한 발짝씩, 꾸준히.


적당한 결핍은 쾌락을 증폭시킨다. 그 옛날 '에피큐리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던 지혜다. 쾌락주의는 흥청망청한 21세기에 엄청난 오해에 휩싸여 있다. 사실 쾌락주의는 절제를 통해 그것을 깊게 체험하라는 말과 같다. 꿀을 좋아하는 곰돌이 푸우가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은 사실 '꿀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꿀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꽃은 활짝 피기 전이, 꿀은 먹기 전에 가장 달콤하다. 우리는 너무 즉각적인 만족의 세계에 사는 건 아닐까? 기다림은 우리에게 결과를 떠나 과정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오히려 만끽이라는 말은 이 설렘 뒤에만 따라오는 충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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