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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Feb 26. 2017

무기력한 당신에게

에리히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제목부터 너무나 매력적이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나를 포함한 대다수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가버리는데, 다시 돌아온 주말과 매달 1일에는 '난 뭘하고 산거지'란 생각이 들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하는 무기력감에 빠지길 반복한다. 무기력하지 않기위해 이것저것 일을 벌이긴 하지만, 또 지내다보면 더 큰 공허함에 빠지는 무한루프. 이를 타개할 수많은 자기개발류의 서적들이 나와있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읽는 순간 잠시 고취될 뿐. 내 삶은 여전히 지속되거나 버티고있을 뿐이다.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어떠한 방법론을 제시해주는 실용서적은 아니지만 그 원인을 진단해보고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돕는 책이다. 지난 번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리뷰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에리히 프롬은 철학적인 배경을 제시해주기에 다른 실용적인 서적들과 함께 읽는다면 더욱 풍부하게 다가온다.




당신은 무기력한가요?


책에서는 뒷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리뷰는 이 부분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무기력함의 현상들. 혹시 이 중에 '나다!' 싶은 것이 있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처럼 당신도 무기력함의 루프에 빠져있는 것이다.


#1. 난 원래 그래.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자신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특이할 정도로 자주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고, 다른 사람이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크게 놀란다. 이 놀라움을 따라가 보면 자신이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하다는 깊은 확신이 원인으로 밝혀진다. (중략)
그들은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에 모든 관심을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기존의 특성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얻을 만큼 똑똑한지, 예쁜지, 착한지 하는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에리히프롬은 이 단계를 극단적 무력감으로 인한 신경증적 인성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극단적 무력감의 상태.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신경증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아마 이 단계에 해당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2.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면, 새로운 직장에 간다면 달라질거야.

합리화는 정당화의 성격보다 위로의 성격을 띠고 자신의 무기력이 일시적일 뿐이라는 희망을 일깨우는 데 기여한다. 이런 위로의 합리화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형태는 기적에 대한 믿음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외부에서 온 어떤 사건으로 인해 갑자기 자신의 무기력이 사라지고 성공, 능력, 권력, 행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이룰 것이라는 상상이다.
이런 믿음이 나타나는 형태는 극도로 다양하다. 흔한 것으로는 새로운 애정 관계, 다른 도시나 집으로의 이사, 새 양복, 새해는 물론이고 일이 더 잘되는 새로운 종이 한 장이 될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라도 외부 상황의 어떤 변화가 급변을 몰고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위안을 주는 이 모든 상상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은 원하는 성공을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외부의 힘이나 상태가 갑자기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보단 무력감을 덜 인식할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 외부의 어떤 변화로 인해서 자신의 삶도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고있지만 정작 자신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고 있지 않은 상태. 나 역시도 종종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면, 새로운 직장에 간다면?'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애정 관계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해 애정관계 조차 망하거나, 현재 직장에 대한 불만만 쌓여가는 더 최악의 상태일 뿐이다. 스스로 변하지 않고 외부에 의해 내 삶이 달라지길 기대하는 수동적 태도는 지금 나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곤 한다.


#3.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난 무기력하지 않아! 그런데..

무력감을 희미하게 의식은 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뾰족한 가시가 무뎌지는 경우, 무력감을 억압하는 세 번째 반응이 나타난다. 이 경우 무력감은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된다. 과보상의 가장 흔한 경우가 분주함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이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간의 정반대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분주하다. 그 무엇도 시도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문제를 자꾸만 쌓아가지도,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상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것저것을 감행하여 위험을 막기 위해 극도로 활동적이라는 인상을 일깨운다. 가짜 활력과 진짜 활력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가짜 분주함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게까지 확장되며,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읽으면서 아 이건 나다, 라고 느꼈다.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의 상태를 겪지 않았을까. 과보상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 너무 적확한 표현이다. 내가 특별히 무기력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이것저것 많은 활동에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지만, 오히려 그 후에 더 큰 무기력감에 빠지게된다. 그것은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던 가짜 활력이기 때문이다. 내 상황을 진짜 해결할 수 있는 곳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들에 에너지를 쏟는 것. 그러다보니 그 분주함이 끝나고나면 '이렇게 해서 뭐하나' 싶은 더 큰 무력감이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일까?


이 책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바로 우리가 무기력함을 느끼는 그 근원을 찾는 것이다. 원인을 알아야 그 해결책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 첫 번째로 우선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모른다 고 말한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현대인은 모두가 ‘자신의’ 목표라고 우기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모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위험과 책임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의 목표를 정하는 데에는 심각한 공포를 느낀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증거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적은 취업 준비를 하던 딱 1년 동안이었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던 일이 있었고, 매일매일 동기부여를 했으며, 그 꿈을 위해 하나씩 공부해나가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채, 취준에 지쳤던 나는 남들이 괜찮다고 생각할만한 직장에 '우선'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준비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삶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에, 또 매달 들어오는 월급을 보며 그 꿈을 놓아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의 시간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삶을 지속시키다보니 '무력감'에 빠진 것이다. 그 꿈을 놓기를 결정했다면, 그 후 다시 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어야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다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혼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증거'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늘 열정을 쏟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열정을 쏟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미뤄둔채 지내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는 건 간단하지가 않기 때문에 나처럼 회피한 채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살거나, 혹은 손쉬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타인의 잣대로 나의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현대인은 마케팅 지향형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 보단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포장하는 선택을 내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큼 손 쉬운 선택이 없다. 타인의 잣대로 선택했기에,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이것으로 어느 정도의 성취감,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스스로에 대한 인정이 아닌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에선 점점 멀어진채 타인의 기대에만 부응하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나는 이 관계를 마케팅 지향이라 불렀다. 인간은 자신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사물로 느꼈다. 이는 스스로를 사랑과 공포와 확신과 의혹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된 추상으로서 느끼는 방식이다. 그렇게 스스로 소외된 인간은 자아감 전체를, 즉 스스로가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을 거의 상실할 수밖에 없다. (중략)

정체성이 상실되면 순응이 더욱 시급해진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때에만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다. 타인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아 더욱 고립될 위험에 처할 뿐 아니라 인격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정신적 건강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무기력할 때 보이는 증상들, 그리고 무기력함의 이유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기력함이 꼭 축-쳐진 상태가 아닌 오히려 분주하게 생활하고 미래에 어떤 낙관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발현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그 무기력함의 원인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핵심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렇다면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방법은 바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세상의 모든 것들에 감탄할 수 있는 능력

첫 번째 조건은 감탄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노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방향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간다. 당황하고 놀라고 감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의 능력을 잃는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무지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2. 지금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건, 어떤 글을 읽건, 산책을 하건, 이 모든 일을 집중해서 한다면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3. 스스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자아 경험 능력

자아 경험의 능력은 진짜 삶의 또 한가지 조건이다. ‘나는 이런저런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이 의견을 분석해 보면 그 사람은 그저 누군가에게 전해들었거나 신문에서 읽었거나 어릴 적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말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각에 해당되는 내용은 감정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것이다.      


#4. 갈등을 피하지않고 받아들이는 힘

(진짜 삶의) 또 한가지 조건은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런 생각은 갈등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된다. 현대의 교육은 그 전체가 아이에게서 갈등의 경험을 덜어주는 것이 목적이다. 모든 것을 수월하게 해주고 아이를 정성껏 보살핀다. 갈등은 해로운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오류다. 사실은 그 반대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요약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 아닐까.


최근 소설 <데미안>을 읽었는데, 이 책과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유사했다.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선과 악에 대해 고민하고 (#4 갈등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힘), 데미안이 제시한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고 (#1 세상의 모든 것에 감탄할 수 있는 능력), 스스로 고민을 통해 깨우쳐나가며 (#3 스스로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는 자아 경험 능력), 그로 인해 알을 깨고 나와 현재를 살아간다. (#2 지금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철학서적이고 <데미안>은 문학이지만 두 책에서 모두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이 일맥상통함을 느끼며, 결국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지름길 없이 단 하나의 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고민하고 스스로 헤쳐나갈 것. 그 때 우리는 무기력함이 아닌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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