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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Jan 30. 2017

'없음'이 아닌 '있지 않음'에 대하여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책 표지의 여자는 표지색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있다. 보이지만 잘 보이지 않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이 책도 그러하다. 책을 읽고 감상하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만의 방식으로 책을 받아들이고, 작가를 이해하고 있지만. 과연 작가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 글을 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른 소설들처럼 탄탄한 서사도, 쾌감을 주는 클라이막스도 없다. 아주 찰나, 혹은 아주 얇은 감정의 상태만이 있다. 작가라면 본디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길 바라며,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텐데, 그 말들을 최소한으로 응축하여 글을 쓴 느낌이다. 그래서 더욱 독특한 정서가 느껴졌던 책이다. 그렇기에 책에 대한 리뷰도 상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두며.. 나름의 느낀 방식대로 9개의 단편소설을 세 분류로 나눠봤다.      


잡으려할수록 멀어지는 <너무 한낮의 연애>, <보통의 시절>     


가장 좋았던 단편들이다. 표제이기도 한 <너무 한낮의 연애>는 ‘너무’라는 단어도 ‘한낮’이라는 단어도 ‘연애’라는 단어도 모두 좋았다. 연애인데, 한낮의 연애이며, 너무 한낮이라니. 여러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너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느낌이 다소 있다. 하필 ‘너무’인 것이다. 한낮은 대략 12시-2시쯤? 아직 여물지 않은 시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결국 아직 너무 여물지 못한 연애정도 쯤으로 제목이 다가왔다.


그럴것이 화자인 필용이 양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그것을 접는 것도, 시간이 흘러 그녀를 그리워한 것도 모두 필용 중심적으로 행동하지만, 정작 어느 행동에서도 그는 행동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아마 짐작컨대 사랑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을 포함한 삶에 대한 태도 역시 그랬으리라. 하지만 필용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것이 대다수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주체가 된다는 건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이니까. 양희가 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었던 건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 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닌  ‘그 다음에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를 전제로 둔 태도이다.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할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그날도 필용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해 한창 떠들고 있었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양희가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했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필용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고백한 사람은 양희인데 그 몇 분 사이에 그 사랑에 목매는 사람은 자기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닌데, 필용은 생각했다.
(중략)
“오늘은 어때?”
“별일 없는데.”
“아니 그러니까 네가 어제 말한 그것 말이야. 오늘도 지속되고 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필용은 자신이 긴장하는 걸 느꼈다. 왜 긴장하나? 필용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렇죠, 오늘도.”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 <너무 한낮의 연애> 中


아, 선배 나 안해요, 사랑.
“안 해?”
“네.”
“왜?”
“없어졌어요.”
(중략)
“야, 너 은근 매력 있어.” 필용이 인심 쓰듯, 달래듯 양희에게 말을 붙였다. “난 너처럼 꾸밈없고 소박한 애가 괜찮더라고.”
양희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양희가 아무 말이 없자 필용의 상찬이 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필용이 은근히 경멸해왔던 양희의 거의 모든 점들이 유니크한 것, 매력적인 것, 평가받을 만한 것으로 거론되었다. 양희의 재미없는 대본마저도. 하지만 양희의 없음은 달라지지 않았고 필용은 그 없음에 목매달린 개처럼 헐떡거리면서 양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것들에 사탕발림을 하다가 돌변해 물어뜯기 시작했다.
  - <너무 한낮의 연애> 中    


옳고 그름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너무 한낮의 시간은 있는 것이고, 그것을 견뎌낸다고 해서 아주 훌륭한 무언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매 순간 순간에 집중한 양희는 어렸을 때 썼던 극본을 무대에 올리지만, 이를 봐주는 관객은 없다. (심지어 매번 관객석에서 박수를 보내던 한 남자도 소설 말미에선 극장 직원임이 밝혀진다.) 다만 한낮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 설령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견뎌내는 것이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중략)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후략)   - <너무 한낮의 연애> 中


없음이 아닌 있지않음으로 단단해지는 것들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다른 단편들에 비해 유난히 캐릭터가 돋보였던 작품들이다. 특히 처음에는 각 단편의 세 인물 - 조중균, 세실리아, 모과장 –이 현실에서 도태되거나 유리된 사람들로 생각된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무료(월급에서 식대를 일부 떼어가기 때문) 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대가로 식대를 받기 위해, 매일 점심시간이면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힌 수첩에 식당 아줌마의 사인을 받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식당 앞에 서 있는 남자, 조중균.      


대학시절 동기들에게 엉기길 잘하고, 친해지면 술먹고 삐삐에 울면서 음성 녹음을 남기는 등 계속 엉기는 성격 때문에, 혹은 남자애들의 성적 놀림감으로 엉덩이가 커서 ‘엉겅퀸’이라고 불렸던 세실리아.     


생산직으로 일하면서 현장에서는 매번 싸우기 일쑤, 나이가 많아 정리해고 대상자에 오르지만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과 노조로 연대해 싸우기 싫어하는 개인주의의 성향, 퇴근 후엔 집 잃은 고양이들을 구하는 것을 낙으로 사는 남자 모과장.      


꼭 어딘가 하나 부족한 사람들. 그래서 ‘보통’ 사람들(책에서는 화자가 각 세 캐릭터가 아닌 영주, 정은 등 다른 인물이 저 셋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쓰여져있다보니 더욱이 저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시시각각 달라짐을 느끼게 된다.)의 눈에는 어딘가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반성하고, 나아가 그들을 응원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이로써 희망적인 느낌을 받기도, 또 부끄러운 느낌을 받기도 한다.      


특히 조중균과 세실리아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흘러가는대로, 다수가 행동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부끄러움을 알기에 자신의 행동에 고집이 있다. 그것이 타인의 눈에는 어딘가 튀어나온 송곳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송곳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조금씩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왜 문제가 없는 겁니까?” 조중균씨가 물었다.
“이름 적기가 시험이야, 이름만 적으면 돼.” 감독관이 조중균씨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중균씨는 부끄러웠다. 
(중략)
그때 그 시험장에서 쓴 시 제목은 ‘지나간 세계’였다. 형수씨 말로는 그 당시 집회나 학회실이나 엠티에서 어떤 시보다도 자주 낭송됐다고 했다. 
“아 그래서 조중균씨가 유명해졌구나.” 전철 끊길 시간이 되어서 나는 얼른 결론을 냈다.
“아닙니다.” 조중균씨가 불콰해진 얼굴로 나를 건너보았다. 조중균씨는 그 시는 자기가 썼지만 자기 시는 아니라고 했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자기 이름을 붙여 자기가 쓴 것처럼 연단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낭송할 수 있었으니까.  - <조중균의 세계> 中

    

“이렇게 웃은 건 아주 오랜만, 정말 배가 아프도록 웃었어.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도서관에서 울곤 하는 걸 내가 봤으니까. 아주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는 말해야겠다. 말해야겠어. 치운이 걔는 쓰레기야. 그날 밤 취한 나를 데려다주면서...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그런 건 연애도 뭣도 아니야, 그런건 폭력이야. 정은아, 기집애야. 너 너무 재밌다. 어떻게 이렇게 재밌어졌어? 하지만 이제는 찾아오지 마. 다신 찾아오지 마.” 
세실리아가 팔을 풀었다.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그렇게 빠져나가는 게 싫어서 세실리아를 붙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안아주지 않았고 마지막 인사도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얼음송곳과 구덩이가 있는 그 간소하고 조용한 방으로.   - <세실리아> 中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바로 이 세 작품은 없음이 아닌 있지 않음의 상태를 견뎌내 단단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싶다.      


하락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별에서>, <반월>     


뒷이야기가 가장 궁금한 단편들이다. 어둡고 때론 무서운 분위기의 이야기들로 짧은 단편임에도 긴장감과 스릴이 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건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단편들이 보여주고 싶은 건 하락하고 난 후 어떻게 됐다는 것이 아닌 하락하는 그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주 사적인 인생의 하락일 수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하락일수도, 중산층으로서 삶의 몰락일수도 있다. 중요한건 하락하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     


마지막은 소설집 맨 뒤쪽의 평론가의 글에서 발췌한 부분으로 끝맺음하고자 한다.

      

“다 맨숭맨숭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로 만드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자신과 무관한 양, 한걸음 떨어져 랩을 하듯 중얼거리는 화자의 화법 때문이다. 그러나 흐트러지면서 부드러워진 분위기는 김대춘의 집에서 반전된다. 김대춘의 비천하게 엎드린 자세는 어딘가 과장되어 도리어 ‘모욕감’을 느끼게 하고, 급기야 그의 입에서는 자신이 죽게 하지 않았다는 고백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의 생을 지탱시켜왔던 분노의 원동력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화자가 이 모든 상황을 빠르게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수습하기 위해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고 공부하는 사람은 순진무구한 아기 같은 사람이니까” 라는 알리바이를 다시 반복하기 시작할 때, ‘상준이’는 단호하게 말한다. “잊기는 어떻게 잊어요? 이미 봤는데 어떻게 잊어요?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잊어요?”
저 말을 두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기에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식으로 의미 부여하는 것은 김금희 소설에 대한 완벽한 오해일 것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유머러스한 이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상준이의 저 말로 인해 어쩐지 슬픈 맨얼굴을 드러내고 마는 것 같다. 그 슬픔은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동력 삼아 긴 시간을 에돌아 왔으나 그간 버텨온 시간들에 대해서 온당하게 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마주한 허탈함이 아닐까.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모욕감이나 부채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실상을 덮고 있는 그 아슬아슬한 베일을 걷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눙치고 넘어가야만 하는 매 순간의 곤경을 아프게 드러낸다.  - <보통의 시절> 에 대하여

    

롤랑 바르트는 ‘작가’와 ‘글쟁이’를 구별했다. ‘작가’란 제도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채 언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소유해온 자다. 작가가 세상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면, ‘글쟁이’의 글쓰기는 목적 지향적 행위이다. 그들에게 쓰는 일이란 곧 상황에 개입하는 행위이며,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성을 보존하고 진실성을 지켜내는 일이 된다. 조중균씨는 지나간 세계를 쓰는 순간, 자발적으로 주체성을 결락시키며 글쟁이의 길을 간다. 글을 쓰는 자신의 존재의 현재성을 지워버리는 대신, 그는 그 시가 낭독되는 모든 순간에 현존하는 길을 택한다. 그래서 그의 작가로서의 이름은 지워지지만, 지워진 이름의 ‘부재하는 존재’는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렇게 조중균의 세계가, 하나인 동시에 모두인 존재가 태어난다. 그는 오직 망각되는 형식으로만 기억되고 사라짐으로써 전위되어 잔존한다.  - <조중균의 세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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