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알랭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사랑의 기술>의 실용지침서 버전처럼 보인다. 실제 알랭드 보통 역시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구절을 통해 이런 견해를 드러낸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다만 에리히 프롬은 왜 사랑을 배워야하는 기술인지에 대해 철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면, 알랭드보통은 라비와 커스틴이라는 한 커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기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하나 사례로서 보여준다. 이 두가지 책을 같이 읽는다면 사랑을 왜 배워야하는지, 또 어떻게 배워야하는지에 대해 풍부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사랑은 좀 더 '감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빠지는' 것이고, 그걸 유지하는 것 역시 사랑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만 있다면 어떤 것이 문제랴. 결국 둘 사이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건, 사랑하는 마음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것 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책을 읽고나서, 또 실제로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겪다보니 아무리 감정이 충만하다 하더라도 '기술 없는' 사랑은 깨질 수 밖에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기술은 내가 '사랑받기' 위한 기술이 아닌,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기술이다.
그 기술을 이루는 가장 큰 전제, 그리고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은 나에게 맞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의 불꽃이 튀는 순간에야, 그 사람의 장점은 아주 크게 보이고 단점은 내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며, 이렇게 꼭 맞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특히 상대방의 약한 모습을 처음 볼 때만큼 그 사람과 친밀해지는 순간도 없다.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편, 사랑은 약점에 관한 것, 상대방의 허약함과 슬픔에 감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약점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시기에(즉, 주로 초기에) 그렇다. 연인이 위기에 빠져 낙담하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우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지만 격원할 만큼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 그들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망연자실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지지자로서의 새 역할을 부여받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덜 부끄러워하게 되고 아픈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과 더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장점은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단점은 더욱 커져 보인다. 거의 모든 연애가 그렇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두 사람은 그만큼 친밀하지 않은 것이다.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기대가 생기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갈수록 맞지 않는 부분들이 부딪힐 수 밖에 없고 그것들이 반복될수록 서로의 단점이 도드라져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욱이 연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친구'관계라면, 가끔씩 만나 서로의 공통 취향이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함께 시간을 나누기 때문에 그들의 단점이 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러려니'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범위가 더 크다. 하지만 연인관계는, 특히나 미래를 약속했다면, 이 단점이 나의 삶에 미칠 영향이 더욱 크기 (또한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잦은 다툼과 이해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친구라면 하지 않을 말들, 행동들을 가장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내뱉게 된다.
학생을 가르칠 때에는 최고의 배려와 인내만이 효과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중략) 한 번 신중하게 부정적 평가를 끼워 넣기 위해 최소한 열 번 칭찬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차분함을 유지해야한다. 그러나 교사의 차분함을 가장 확실히 보장하는 것은 수업의 성패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함이다. (중략) 화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학생들이 교사의 삶을 크게 좌우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매끄럽고 성공적인 교수법의 필수적인 면모다. 하지만 차분함은 항상 사랑이라는 교실 밖에서 서성인다.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때의 ‘학생’은 단지 잠시 잠깐의 책임이 아니라, 평생을 건 약속이다. 실패하면 존재가 파탄이 난다. 그러니 우리가 자제심을 잃고 – 충고하는 행위의 정당성이나 고결함을 스스로 믿지 못함을 암시하는 – 서툴고 경솔한 말을 내뱉기 쉬운 것은 당연하다. (중략) 자존감이 꺾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아가 신랄한 모욕을 감당한 결과로 더 이성적이되거나 자신의 성격을 더 깊이 통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성격의 고질적인 측면을 다루는 데 있어서 따뜻하게 접근한다기보다 우리의 천성을 야멸차고 분별없이 공격하는 것만 같은 제언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방어적이고 과민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사랑의 기술의 핵심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상대방도 완벽하지 않으며, 나도 완벽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완벽한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완벽을 추구할 때 다툼이 생기며, 결국 그 다툼으로 인해 처음 사랑하게 된 그의 장점과 사랑스러운 면들까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완벽한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에게 한 눈을 팔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그 완벽할 것 같은 새로운 사람 역시, 시간이 지나면 절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사랑의 열병은 망상이 아니다. (중략) 열병의 오류는 좀 더 교묘한 문제다. 우리가 다양한 단점을 꿰뚫고 있는 현재의 파트너 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때 드러날 상당히 심각한 결점, 황홀했던 처음의 감정을 비웃음거리로 만들 만한 결점도 있다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진리를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 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결국 꼭 맞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것을 전제로 두게되면 우리가 관계에서 보다 중요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게된다. 우선 누구와도 꼭 맞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렇다면 '어떤 안맞는' 부분을 고를 것인지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무엇이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말이다. 몇 번의 헤어짐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헤어짐을 복기함으로써 찾아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엔 권위적인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다. 권위적인 사람은 나보다 자기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해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결국 그를 믿을 수 없게하며,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르며,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르고 나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두번째로는 '잘' 싸우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와도 꼭 맞지 않는다는 건, 결국 누구와도 싸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툼이 있을 때 잘 싸우는 것, 즉 좀 더 '현명하게' 싸우는 것이 관계를 유지시키는데 중요하다.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합의점을 찾아갈 것인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과 마음을 들어보려하고, 이를 통해 내가 A를 양보하면, 상대가 B를 양보하면서 서로 조율해나가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합의가 불가능하기도 하고 (자신이 모든 면에서 다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입을 꾹 닫아버리기도 한다. 이 경우엔 결국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맞지 않는 부분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조율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질 수 밖에 없다.
뜨거운 열정의 순간만 반복하는 사랑을 되풀이 할 것인지, 혹은 열정의 순간이 지나간 후에도 은은하게 하나의 사랑을 이어나갈 것인지는 '선택'이다. 그 사람의 가치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후자를 택한다면,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에 있어서 기술은 필요하다는 마음과 그 기술을 익히려는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 보통 좋은 구절이 있는 페이지를 꼬깃 접어두는데, 이 책에서는 아예 한 챕터를 다 접어두었다. 전체를 다 옮기기는 너무 많아서 정리해서 올려본다. BGM은 윤종신의 <오르막길>을 추천!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은 근본에 있어서는 불완전 할 것이다. 상처없이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이상에 못 미치는 양육을 받았다. 우리는 설명하기보다 싸우고, 알려주기보다 들볶고, 고민거리를 분석하기보다 초조해하고, 거짓말을 하고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려 탓을 한다. (중략)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 일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기 새기는데 도움이 된다. ‘제 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주 든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이 이해되고 있다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이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진 않는다. 연인의 이해 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있고,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은 철저히 직관에 반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대체로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숙은 자신의 광기를 감지하고, 적절한 때에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새장 안에서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 식료품 같은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당연히 까다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려는 삶의 속성일 뿐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해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알고 인생을 시작한다.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간통은 실현 가능한 해답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쪽도 간통의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 깊이 단절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 단 한번의 의미없는 모험에도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반복적인 습성이 있다. 간통의 피해자는 파트너가 몇 시간 동안 낯선 이와 뒤엉켜 ‘배신’하는 동안에 그의 마음에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제대로 알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우리는 원하는만큼 여러 번 그들의 변명을 들을 수는 있지만 내심 한 가지 만큼은 확신한다. 그들이 우리를 굴욕에 빠뜨리기로 작심을 한 것이며, 그들의 사랑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지위와 함께 남김없이 증발해버렸다고 말이다. 다른 어떤 결론을 주장한다면 파도와 싸우는 꼴이 된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이제 (평온한 날에는) 행복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에게 지적당하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러브스토리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작에만 너무 얽매여있지 않은 이야기,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지 않는 이야기, 우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 사랑의 여정에서 거쳐 갈 길이 우울하더라도 희망적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