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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Nov 20. 2017

사랑에 대한 다양한 담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지진희, 김지수, 한혜진 주연의 SBS드라마 <따뜻한 말한마디>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부부인 지진희와 김지수 사이에 한혜진이라는 새로운 여자가 들어온다. 한혜진 역시 남편이 있기는 마찬가지. 결혼 후 찾아온 설레는 감정 속에서 지진희와 한혜진은 쉽사리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미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다음 단계로 진전시키지 못한채 서로 애만 끓기 때문에 오히려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던 둘은 어느 날, 호텔에 간다. 하지만 아무런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은 채 나온다. 육체적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서 그 둘 간의 감정이 한낱 '불륜'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지수는 분개한다. 차라리 관계를 맺지 그랬냐고, 하룻밤의 실수로 끝내버리지 그랬냐고, 사랑이 아닌 그냥 욕망 덩어리였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용서했을 것이라고. 그런데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까지 둘 간의 감정을 지켜냈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울고 소리치며 지진희에게 책 한권을 내던진다. 그 책이 바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었다. 지진희가 한혜진에게 선물하려던 이 책에는 '사랑에는 다양한 색깔이 있다.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랑이다.' 란 쪽지가 적혀있었다.


두 권으로 이뤄진 사랑 대서사시


육체적 사랑? 정신적 사랑?


이 드라마를 보면서 굉장히 공감됐던 부분이다. 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파트너가 다른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더욱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여성들은 자신의 파트너가 차라리 다른 여자와 잠을 잔 것이면 용서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사랑한 것을 더욱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중에 무엇이 더 진짜 사랑에 가까운 것일까. 과연 둘은 각각 하나만 있을 때에도 사랑이라는 온전한 감정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콜레라 시대의 사랑> 에서는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 라는 두 남자와 페르미나 다사라는 한 여성이 등장한다. 아리사와 다사는 어린 시절 서로를 열렬히 좋아했었다. 하지만 다사는 후베날 박사와 결혼하게 되고, 아리사는 평생에 걸쳐서 다사만을 바라보고 기다린다. 단, 정신적으로만 말이다. 그는 수백명의 여자들과 짧은 만남과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 되뇌인다. '내 마음만은 다사의 것 이라고'. 그리고 후베날 박사가 죽은 날, 다사에게 고백한다. 평생에 걸쳐 다사만을 바라보고 기다려왔다고 말이다. 


이 책은 세 남녀의 삶을 통해 사랑에 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 


아리사는 정말 다사만을 사랑한 것이 맞을까? 말로는 다사만을 그리워했다고 하지만, 그의 삶을 돌이켜보건데 과연 그가 만난 수많은 여자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명확히 말할 수 없다. 육체적 관계는 사랑이 아니고, 정신적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게다가 그가 만났던 여자들 중엔 마음을 주었던 것처럼 보이는 여자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다사에 대한 순정을 말할수록 그 마음이 고귀하기보단 때론 집착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관계에 직접 뛰어들기보단 늘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녀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그 속에서 혼자 사랑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그녀가 먹는 모습, 포도주에 입만 대는 모습, 가문에서 대대로 운영해 온 돈 산초 호텔의 사 대째 주인과 농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외로운 식탁에서 그녀와 삶의 한순간을 살았다. 그렇게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장소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과연 그는 그녀를 사랑할 것일까,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한 것일까. 

              

사실 아리사와 다사의 어렸을 때 만남은, 둘 간의 감정이 발전하기도 전에 부모의 반대로 찢어지면서부터 활활 타올랐던, 전형적으로 반대에 부딪혀 더 커진 사랑이었다. 아리사는 이뤄지지 못한 그 사랑을 붙잡고 순정을 맹세한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어린시절에 멈춰버렸기에, 그의 순정은 다사를 위한 순정이라기 보단, 자기 자신을 위한 순정처럼 느껴지곤 했다. 


우주를 가득 채운 사랑과 블랙홀처럼 커지는 불안
입 속을 가득 메운 키스와 꽉 쥔 두 사람의 손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운 너의 마음 언제나 아쉬운 가로등 밑
비누방울처럼 영롱한 시간은 언제 터질 줄 모르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단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날 바라보는 게 아니고 날 바라보고 있단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 오지은 <날 사랑하는게 아니고> 중


사랑 = 결혼?


한편 다사가 후베날 박사를 선택한 이유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였다. 결혼은 그야말로 현실이기에 조건을 무시할 수가 없었고, 안정적인 수입과 안락한 삶을 보장할 후베날 박사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참을 수 없이 답해하기도 했다. 어쩌면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후베날 박사의 완벽한 삶 속에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이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 내렸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그 어떤 신기루도 꿈꾸지 않고 인생의 성숙기라는 길모퉁이를 돌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환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젊었을 때 복음 공원에서 꿈꾸었던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대로, 자신이 돈 많은 하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남편이 빌려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만을 위해 건설한 거대한 행복의 제국을 다스리는 절대 군주였던 것이다. 그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자기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녀는 남편의 신성한 하녀에 불과했다.


사랑 = 결혼 = 행복 ?


하지만 전반부에서 나오는 다사와 후베날 박사의 노년기 모습이 불행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사랑하지 않아서 한 결혼이었다고해서 무조건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답답해하고, 말도안되는 사소한 것들로 싸우고, 후베날 박사가 바람이 나기도 했지만.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에도 같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노년기의 그들의 모습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맞춰가면서 오히려 편안해보이기까지 했다. 과연 사랑만이 결혼의 최상의 조건인가. 사랑해서 결혼해야만 행복한가.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사람들은 덜 사랑하기 때문인가. 현실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더라도 사랑한다면 결혼해야하는가. 그러면 행복한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사와 후베날은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했다. 그리고 어느 날 후베날 박사가 죽었다. 그 빈자리에서 오는 고통을 서술하는 부분은 다사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만큼 슬펐다. 그녀는 분명 그를 사랑했다. 시작이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였을지 몰라도, 그의 익숙함에 대한 빈자리 때문인지 몰라도, 사랑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죽은 남편과 살아남은 자기 중에서 누가 더 죽은 것인지 자문하면서 고뇌하곤 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하다 말고 중간에 멈추고는, 그에게 할 말을 잊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곤 했다. 그렇게 시시각각 남편만이 대답해 줄 수 있는 수많은 일상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언젠가 그는 그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불구자들이 더 이상 자기 몸에 달려 있지 않은 다리에서 고통과 경련과 가려움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동시에 이제는 그가 없는 곳에서 그를 느끼고 있었다.


70대 노인의 사랑


그렇게 그가 떠난 후 어렸을 적 만났던 아리사를 다시 만나게 된다. 70대 노인이 되어서 말이다. 자식들은, 그 둘이 다 늙어서 서로 대화 동무 정도 해주는 친구 사이가 되길 바랐지만. 그들은 70대에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자식들은 그것이 추하다고, 남편을 잃고나서 어떻게 다 늙어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 여전히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젊은 두 남녀의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노인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다 소진되고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사랑은 시작될 수 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 생활의 지난한 고통의 언덕을 뛰어넘은 듯했고,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직접 사랑의 심장부로 들어간 것 같았다. 열정의 함정과 환상의 잔인한 조롱, 그리고 환멸의 신기루를 극복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늙은 부부처럼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다사와 아리사가 재회하는 결말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불멸의 사랑에 관한 낭만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말이 그렇다고 해서 다사가 아리사의 사랑을 외면하고 현실적인 삶을 택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후베날 박사와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사랑한 시간도, 아리사가 평생에 걸쳐 수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사실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은 삶의 끝자락에서도 또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해 다양한 담론을 제시한다. 읽으면서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고, 어떤 사랑이 더 위대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다만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늙어서까지 항상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모든 책임을 다 하는 '다사'는 정말로 위대하단 것이다. 이 매력적인 여성이 사랑을 하고, 선택하고, 후회하고, 또 다시 나아가는 이야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도 재미있고, '사랑에 대한 담론'으로도 생각해볼만한 부분이 많다. 그녀와 함께 위대한 사랑이야기 한 편 읽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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