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쇼코의 미소>
글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난다고 생각한다.
취업준비생 시절, 같은 과의 선배와 몇달 간 함께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서로 첨삭을 하는 스터디 였는데, 그 선배가 쓴 글을 읽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1-2시간 안에 쓴 1,500자 짜리의 짧은 단편이었는데도 그 선배의 글은 늘 마음을 울렸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냥 그 선배의 차분한 성격와 따뜻한 마음이 글의 곳곳에 베어있었다. 날은 추웠던 겨울이었고 학교의 칙칙한 고시반 안에서, 누구는 붙고 누구는 떨어지며 알게모르게 다들 자존감이 낮았던 그 때, 서로가 열심히 쓴 글을 지적해야만하는 스터디에서도, 그 선배의 글은 따뜻한 위로가 되곤 했다.
<쇼코의 미소>를 읽으며 그 선배가 떠올랐다. 7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이 책은 작가가 온 마음으로 쓴 것 같은 책이었다. 굉장히 쉽게 읽히지만, 글 하나하나에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베어있다. 이런 느낌들이 너무너무 좋았다. 그저 좋았다고 밖에 표현 할 수가 없다.
여러 감정의 중첩
요즘 필름 사진 찍기에 푹 빠져있는데 필름은 디지털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담긴다. 하지만 찍으면 찍을수록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어느 감정 이상이 잘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담길랑 말랑한 정도에서 멈춘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좀 더 풍성하게 담을 수 있을까, 가 요즘 나의 고민이었다.
내가 찾은 답은 '여러 감정의 중첩'이다.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여러가지의 감정을 담는 것. 바로 책 <쇼코의 미소>처럼 말이다. <쇼코의 미소>에 실린 단편들은 시종일관 따뜻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읽는 내내 마음 한 곳을 불편하게 하고, 때론 긴장되게 하지만 끝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바로 그 지점이 좋았다. 아래는 이런 느낌을 받았던 지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어봤다.
#1. 이국적인 풍경 속의 한국적 서사
<쇼코의 미소>는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서로의 집을 다녀가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신짜오 신짜오>는 베트남 가족과 한국 가족이 베를린에서 사는 이야기고, <한지와 영주>는 케냐 사람과 한국 사람이 프랑스 수도원에서 잠시 머무는 이야기다. 또한 <먼 곳에서 온 노래>는 대학 선후배가 러시아에서 다시 만난 이야기다. 7개의 단편 중 4개가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담고 있다.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묘사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안의 서사나 캐릭터는 굉장히 한국적이며 여기서 오는 느낌이 독특했다. 만약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국이라는 공간안에서 풀어냈다면 조금은 뻔하게 느껴졌을 법한데, 이국적인 느낌이 섞여 같은 메시지라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2.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점점 커지는 감정의 진폭
단편들 속의 캐릭터는 모두 작가의 일부인 것 같다. 각기 다른 단편이지만 캐릭터들이 묘하게 중첩되는 이유다. 소유가 영주같고, 영주는 소은같고, 소은은 미카엘라 같다. 소유의 엄마는 순애의 동생 해옥같고, 해옥은 미카엘라의 엄마 같으며, 미카엘라의 엄마는 지민의 할머니 말자같다. 내용만 다를 뿐 등장하는 캐릭터의 성격은 비슷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하나의 완결성을 가진 느낌이다. 어딘가 부족하고 조금은 까칠하면서도 끝내는 따뜻한 이 캐릭터들은 읽을수록 감정의 진폭을 커지게 한다.
#3. 쉽게 읽히지만 아름다운 정서와 문장의 울림
꼭꼭 온 마음을 담아 눌러썼을 것 같은 문장들.
<쇼코의 미소 中>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엄마였다. 평생을 함께 산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눈물을 풀어낼 수조차 없는 사람, 울고 게워내서 씻어낼 줄을 모르는 사람, 그저 차가운 손과 발, 두통처럼, 보이지 않는 증상으로만 아픈 사람이 엄마였다.
“아빠는 삼십 년을 집에서만 보냈어.” 엄마는 할아버지의 뒤통수에 닳아서 내피가 드러난 소파를 만지며 말했다. “믿어지니? 네가 살아온 시간만큼이야.” 엄마는 베란다 귀퉁이의 고무나무를 가리켰다. “저 화분과 다를 바가 없었어. 그게... 얼마나 내 마음을 짓눌렀는지 너는 모를거야.”
<신짜오 신짜오 中>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 中>
곰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면 이모는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죽은 개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엄마는 이모를 사랑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미카엘라 中>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비밀 中>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4. 가장 좋았던 단편은, <미카엘라>
세월호, 정치, 중산층의 몰락. 어떤 이는 이런 단어를 보자마다 지겹다고, 또 그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세월호 이야기가 지겹고, 정치가 내 삶에는 무관하며, 당장 내 앞길이 중요한 '나'가 화자인 이야기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또 그 이야기가 아닌, 진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최은영 작가의 힘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마음의 큰 울림을 남기는, 이국적인 풍경에서 시작해서 한국 사회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그래서 불편하면서도 끝내는 따뜻한.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든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든 그게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엄마는 그녀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아줌마들의 머리를 말고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아빠는 말했다. 자본이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앞으로는 중산층 붕괴가 가속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 속으로 떨어지게 될 거라고. 어쩌라는 건가. 아빠, 지금 이 집안을 빈곤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은 세상도 자본도 아니고 아빠 자신이다. 자기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내를 일곱 평도 안되는 미용실에 하루종일 세워두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하지만 여자는 남편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현장에 가 있는 것이 그의 업이었고, 그 부분에 있어서 그는 누구보다도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가하는 일들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무능하고 가치없는 사람이라고 단죄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헤어롤을 마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남편도 있다. 여자는 세상을 살며 그처럼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깨끗한 샘물같은 그에게 더러운 욕탕이 되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세상에 소용없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세상의 그 많은 소용 있는 사람들이 행한 일들 모두가 진실로 세상에 소용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이었다. 서명운동을 하고 길거리고 나와서 시위를 한다고해도 그 목소리는 점점 소수의 것이 되어가는 듯했다. 세상은 참으로 빨리도 그 일을 잊어버리고 없던 일로 덮어두자 했다. 점심시간에 누군가가 특별법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다가 “지겹지도 않냐”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을 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나이 서른 하나, 그녀 또래의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무엇 하나 바꿔보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녀의 이십대를 통해 깨쳤다.
다수의 선한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세상을 망친다고 아빠는 말했었다. 아빠의 말은 맞았지만, 그녀는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승패가 뻔한 링 위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세상이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자신을 소외시키고 변형시켜서라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부딪쳐 싸우기보다는 편입되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초대받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