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피로사회>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차를 우려내 천천히 마신다. 요가를 한다. 집 앞에 난 채소와 시장에서 산 싱싱한 재료들로 아침밥을 해 먹는다. 졸리면 낮잠을 자기도 하고, 볕이 좋은 집 앞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도 한다. 그야말로 평범한 하루다. <효리네 민박>이 사랑받은 이유는 바로 저 평범한 일상 때문이다. 알람소리에 일어나 정신없이 씻고, 입에 빵 하나를 물고, 지하철에 낑겨 타서 출근해 일을 하는 평범한 우리들에겐 저 평범한 하루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느린 하루
<효리네 민박>의 하루는 느리게 흘러간다. 손님들이 오면 그들을 맞이하느라 바쁘지만 그 외의 시간들은 느릿느릿 흐른다. 느린 일상은 평범한 것들도 반짝이게 한다. 특히 아이유는 가수로, 연기자로 쉴틈없이 달려왔지만 <효리네 민박>에서는 '지은이'라는 본명으로 불리며 마음껏 평범함을 누린다. 그 속에서 지은이는 자신이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효리와 이상순이라는 좋은 멘토들과 이야기하며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깨닫는다. 이 모든건 하루가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르고 효율성이 강조되는 삶을 살고 있다. 빠르면 빠를 수록, 또 그 안에서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처리해낼 수록 개인의 능력은 뛰어나다고 인정받는다. 일도, 취미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틈 없이 이뤄진다. 이번에 읽은 책 <피로사회>는 이러한 사회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이 책은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독일에서 낸 책으로, 독일에서 먼저 주목받은 후 나중에 한국어로 변역돼 나왔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효율성이 중요시 되는 삶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감을 받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YES, WE CAN
<피로사회>에서는 이러한 삶을 성과를 추구한다는 의미로 '성과사회'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과사회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성과 위주의 삶을 '우리 스스로'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성과를 지향하고, 그래서 스스로 성과 사회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자신의 의지로 성과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문제의 심각성은 잘 드러나지 않고 모두 개개인의 책임으로 지워진다. 성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성과만을 추구하는 삶의 끝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 번아웃된 경험이 있지 않은가.
- 긍정성의 폭력에 대한 서술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류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 내가 나를 착취하는 것에 대한 서술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긱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그런데 왜 성과를 지향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성과를 지향하게 된 것일까. <피로사회>는 '긍정성'을 주목한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 환경, 내가 노력해 더 많은 일을 처리할수록 성과로 인정받는 분위기탓에 우리는 "그래 할 수 있다"고 마음 먹어 스스로 성과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달리면 지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번아웃 되거나 심해지면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에 빠져 우울증까지 겪게 된다. 이는 사회가 성과주의시스템이기 때문이라기보단 개개인의 성찰없는 성과 지향주의에 대한 지적이기에, 일견 새로운 부분이 있다.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든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개개인의 성찰이 중요....?
논리가 개인의 성과 지향주의로 흐르다보니, 책에서 제시하는 방향 역시 개개인의 성찰로 결론이 내려진다. 니체의 "사색적 삶"을 인용하며 책은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기를 것을 강조한다. 물론 동의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고 사회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외부의 빠른 변화와 자극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면, 성과주의 시스템과 성과주의 지향의 개인이 맞물려 점점 더 사유하는 힘을 잃어버릴테니까 말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사색적 삶은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밭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정말 그거면 될까?
책의 도입부가 정말 흥미로웠던 것과 달리 뒤로 갈수록 저자가 하려는 말이 잘 공감이 되지를 않았다. 그리고 찬찬히 다시 책을 정리하며 읽어보니, 책에서 말하는 개인이란 '1980~90년대에 열심히 일하면 내 집 하나 마련할만큼 돈 벌 수 있었던 세대'의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면 이룰 것이 많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래서 뭐가 옳은지 모르고 열심히 일했고, 그러다보니 번아웃된 것이다. 반면 2010년대에 일을 시작한 세대가 번아웃된 데에는 남들에게 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런데 열심히 해도 안되는 현실 때문이었다.
오히려 우리 지금 세대의 무력감에 대한 서술은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반복하는가>에 잘 서술되어 있다. <피로사회>에서 말하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자아 보다는 <나는 왜 무기력을 반복하는가>에서 말하는 "잘 포장되어진 마케팅 지향형" 자아가 지금을 좀 더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높은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 자신을 잘 팔리기 위해 포장해야했던 지금 세대. 그리고 잘 팔리기 위해 자신을 포장한 자아와 나의 진짜 자아 속에서 갈 방향을 잃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이 <피로사회>든 <나는 왜 무기력을 반복하는가>이든 니체의 "사유하는 힘"에 대한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다. 전자든, 후자든 크게보면 사유없는 삶이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 혼자 사유해서는 절대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과 소비주의에 대한 지적이 없다면 그 사유의 힘은 반밖에 안될 것이다. <효리네 민박>이 사랑받은 데에는 "제주도에 넓은 마당이 딸린 집 한채에 살며 일 하지 않고 쉬는" 느린 하루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