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희 <이혼일기>
캄캄한 터널같은 날들이 있다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 것인지, 제대로 가고있는게 맞긴한건지, 끝이 있기는 한건지, 불확실한 날들. 그런 순간들이 올 때면 속수무책이 되곤한다. 분명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지만, 더 분명한건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에는 더 새까만 터널이 있으이란 사실. 이 책은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새까맣고 어두웠을 터널을 지나간 기록이다.
책의 제목은 <이혼일기>. 바로 이혼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도 한국 여자가 프랑스에서 유학 중에 미국 남자를 만나 자신의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미국으로 함께 떠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십여년의 가정을 꾸리다가 이혼을 하게 된 이야기다. 감히 그 감정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는 것 조차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인데, 함께 가족을 이룬 이와 이별을 하는 것은 어떠할 것이며, 아이들은 또 어찌할 것이며, 직업도 없이 남편 하나만 보고 미국에서 삶을 꾸렸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지. 보통의 결심으로는 이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그 이혼에 대한 결심을 적는 구절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 각각 다른 페이지에서 말이다.
두려워서 헤어지지 못하는 이는, 두려워서 사랑하지 못하는 이보다 고통스럽다. 이별의 이야기가 만남의 이야기만큼 활발하게 들려져야 하는 이유다. 현란한 사랑법을 탐구하는 만큼 지혜로운 이별법을 고민해야 한다. 헤어진 상대를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자신을 피해자로 과장하지 않고서도 이별의 이야기가 가능해야한다.
두려워서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는, 두려워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별의 이야기가 만남의 이야기만큼 나누어져야 하는 이유다. 현명한 사랑법을 고민하는 만큼 지혜로운 이별법을 생각해야 한다. 헤어진 상대를 비난하거나 자신을 피해자화시키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이별의 이야기가 있다. 관계를 성찰하고 나아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그리하여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나를 탄생시킬 수 있는 긍정적 이별과 상실, 재탄생의 여정이 있다.
책의 구절을 정리하다가 '엇 이거 아까도 본 말인 것 같은데' 하고 앞으로 돌아가보니 같은 내용이 또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검수를 안했나, 편집자가 오류를 못잡았나 싶었지만 이내 작가가 저 생각과 결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두 번을 적었을까 싶었고, 아마 편집자가 이를 알았어도 저 구절 없이는 책이 서술되기 어려웠음을 이해했으리라 싶었다. 첫 번째 구절과 두 번째 구절은 단어만 바뀐채 그대로인 내용이지만, 두번째 구절에서 추가된 문장이 있다. 바로 '재탄생의 여정'에 대한 문장이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일
이혼에 대한 그녀의 정의일 것이다. 이별, 끝, 상실이 아닌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 <이혼일기>는 물론 이혼에 대한 아픔을 기록한 부분도 있지만, 그 보다는 이혼을 겪으며 다시 자신의 삶을 추스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다. 캄캄한 터널을 뚜벅뚜벅 걸으며 저 멀리 새어나오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과도기는 새로움을 동반하는 창조적인 시기다. 과도기에는 종종 평소에 알지 못했던 생명력이 발휘되고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과도기는 인생 중에 만나는 ‘사적인 지대’다. 과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은 무척이나 달라진다.
<나탈리 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책에서 작가가 인용한 구절 그대로 캄캄한 터널이라는 인생의 과도기를 보낸 기록이다. 그것도 잘 보낸(최소한 그렇게 노력한) 기록. 먼저 관계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그 다음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모두가 굉장히 어렵다. 특히 자신이 쌓아온 것(사랑, 결혼, 가족)을 스스로 그만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책에서도 잠깐씩 언급이 되지만, 이혼하지 않기 위해 몇년에 걸쳐 남편과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싸우기도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상담을 받기도, 그러다 별거를 하기도 한다. 그 모든 노력을 거치고 이혼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실 저만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분명 힘들고 시간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이혼 도장만 채 찍지 못한채 사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자식과 재산 문제가 결부되면...) 그래서 어찌보면 노력을 할만큼 하고, 끝을 인정하는 용기와 노력이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캄캄한 터널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우리에게 준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삶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의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살아가는 일도 그러하다. 다만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갈지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사건의 온전한 주재자로 살아갈 수는 없더라도, 그 안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고 만들고 누려야 한다.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길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관계가 끝난 후에는 자신을 성찰한다. 내가 피해자고, 그 사람이 가해자라고 합리화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을 뿐이다. 특히 남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십여년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자신 스스로를 되찾는 과정이 먼저다. 이 작가의 글을 처음 본 것은 페이스북 쪽글이었다. 몇 백자 되지 않는 글들에 매료되어 페이스북 팔로잉을 했고, 그러던 어느날은 신문사 칼럼에서 그녀의 글을 발견했다. 그리고 작년 쯤 그녀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산 첫 책이 <유혹의 학교>였고, 이 책이 그녀의 두 번째 책이다. (찾아보니, 그녀가 쓴 책은 2013년 <관능적인 삶>, 그리고 2016년 <유혹의 학교>, 2017년 <이혼일기> 총 세권이다.) 그렇게 아내, 엄마가 아닌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기까지의 모든 여정이 바로 이혼 후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테다.
이혼 후 깨달은건, 난 어쩌면 그 남자들이 되고 싶은 욕망을 그 남자들을 사랑하는 걸로 대체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사귀면 내가 실현하지 못한, 그러나 내가 선망하는 자질을 마치 내가 가진 듯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감히 체화하지 못한 당당함을, 나는 그들을 사랑함으로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는 일은 종국에는 가장 철저히 제한된 행위였다. 구속을 자유인 양 뒤바꿔버리는 교묘한 속임수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들을 만족시킬 만큼‘만’ 거침없고 유혹적이고 과감한 ‘나’로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실패로 귀착할 길이었다.
내 욕망과 그 표현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당당할 수 있고 그 결과가 내 위치를 흔들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서 있고 싶다. 지르고 얻고 만족하고 그것에 떳떳할 수 있는 자리를 나의 태도로 만들기로 했다. 나는 한동안은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직접 되어보고 싶다.
그녀가 이혼 일기를 적어내려간 것 처럼 나도 이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기(는 더더욱 아니지만)를 혼자 생각해봤다. 물론 만났던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삐그덕거렸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나의 성급함이었다. 노력을 아주 많이 기울이지 않아도 관계가 자연스럽게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성급해진 나는 관계의 확신을 바랐고, 그러다보니 균형을 잃은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좀 더 여유로워도 될 것 같은데 나이 앞자리에 3자를 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무섭던지. 물론 지금은 뒷자리 숫자가 앞자리 숫자보다 커질까봐 또 무섭기는하다.
그녀의 책에서 건져낸 나의 일기.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한 사람 쪽으로 쏠려가는 듯 느껴지면, 의도적으로라도 무게를 움직여야 한다.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세계를 가지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 내가 열정적으로 잘해내고 싶은 것을 탐험하고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과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야 하고 다른 친구와의 교류도 중요하다. 역할에 따라 친구를 분산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미술을 이야기할 때 좋은 친구, 수학 공부를 함께할 때 알맞은 친구, 운동할 때 편한 친구 등등 다양한 친구를 주변에 두고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확장하는 데에 열중하는 사람은 무게가 한쪽에 쏠리는 걸 방지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무게조절은 한결 수월해진다. 무엇보다도 친구를 한 집단에서만 사귀려고 해선 안된다. 여러 그룹에서 다양한 친구를 두는 편이 좋다.
요즘 저 위의 말을 굉장히 많이 느낀다. 언젠가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탐험하고 발전시키는 시간이 좋다. 그러다보면 좋아하는 것을 같이 나누고 싶기도한데 전에는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과 모든 걸 나누려고 했다면, 요즘에는 각각의 활동(?)별로 함께 나누면 좋은 사람들과 나눈다. 굉장히 폐쇄적이고 높은 벽을 쌓은 채 친구들을 사귀곤 했는데 요즘은 그게 허물어진 걸 느낀다. 그러다보니 세상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 좀 더 일찍 이걸 알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과 좋은 에너지를 나눴을텐데.
당장은 자존심도 상하고 가슴도 아프다. 실연은 매번 그렇다. 그런데 참 신기한건, 그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느덧 돌아보면 성큼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염두에 둘 것은 있다. 섣불리 관계에 환상을 대입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야말로 평생을 기다려왔던 존재라고 믿어버리는 것과 같이. 평생을 기다릴만한 존재는, 어쩌면 그 모든 관계를 통해 거듭날 나 자신이다. 거절당해도 괜찮다. 차여도 괜찮다. 만일 연애에 갑이 있고 강자가 있다면, 관계의 결과에 절박하지 않고 관계 자체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게 되면, 관계에서 강/약자를 따지지 않고 정성을 다 해왔다. 잔정과 미련이 너무 많은 성격이라, 미련을 남기느니 미련이 안남게 최선을 다하는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 쉽게 환상을 대입한다는 것. 너무 쉽게 평생을 기다려왔던 존재라고 생각하고, 나를 위한 선택을 해야할 때에도 '내가 아닌 우리'라는 핑계를 대며 상대에게 결정을 부탁했다. 그것이 결국엔 '나'와 '우리' 모두를 힘겹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평생을 기다릴 만한 존재는, 그 모든 관계를 통해 거듭날 나 자신"이라는 말에 밑줄을 두줄 정도 그어주고 싶다.
나는 L을 포함한 내 연인들을 사랑했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일상으로 품고 보듬고 받아들일 만큼 좋아하지 않았다. 종국엔 사랑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했다. 나조차 질겁하는 내 모습을 보이게 될까 밀어내고 도망갔다. 저지르기 좋아하고 일상을 손쉽게 구깃구깃 버릴 수 있는 인간에게는 사랑만큼 짜릿한 일탈은 없다. 삶이란 대부분의 일상과 약간의 일탈로 흘러가는데, 나는 온통 일탈로 가득한 삶을 도모하고 일상을 지운 듯 살아가려 했다.
사랑 이후를 책임지는 것은 극진한 좋아함들인데, 그걸 배우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살았다. 사랑이 시간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했던 건, 삶을 부정하는 불온함을, 허덕대는 열정의 피로함을 지탱하지 못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기에 이제, 앞으로의 내 삶은 좋아하기의 일상으로 수행되길 희망한다. 어쩌면 가장 단단하고, 사소하나 굳건한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극진한 좋아함들....! 극진한 좋아함은 무엇인지, 내가 뭐를 좋아하는지 늦었지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