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e a week Oct 22. 2017

관계맺음에 게을러지지 말 것

이서희 <유혹의 학교>

한 10번쯤 소개팅을 했을까. 


1명당 2번쯤 만났으니까, 근 1년 새에 새로운 사람과 20번 함께 밥을 먹거나 차(혹은 술)를 마시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 소개팅을 할 땐, 두려움 반 기대 반, 심기일전 하고! 나갔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번을 하고나자 나에 대해 같은 소개, 상대에 대한 같은 질문, 뻔한 이야기의 반복으로 지쳐서 한 동안은 소개팅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소개팅을 시작하면서는 이미 나에게 쌓인 경험치들로 인해 그 사람의 카톡 하나, 약속 장소 선정 하나, 만나서 말투 하나로 그 사람을 나름대로 분석 및 패턴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니 잘 될리가 없다. 어떤 스타일인것까지는 유추하는데 도움이 될진 몰라도 그 사람을 알아가고 호감을 느끼는데에는 분명 엄청난 벽이 되기 때문이다. '아 저런 스타일은 저런 단점이 있고, 그래서 나랑은 이런게 안맞고 부딪힐 것 같아' 라고 단정하는 순간 그 사람을 더 알아가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만남이 2회에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3번 만나는 것이 어찌나 두렵고 어려운지. 


조금 더 어렸을 땐 누군가를 쉽게 만나고, 호감을 느꼈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몰랐던 이야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상대를 패턴화해서 나랑 안 맞는 부분을 찾기보단 그냥 그 만남 자체가 즐겁다보니 자연스럽게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 만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고들 하나보다.)



2-3개월 전 쯤 읽었던 책 <유혹의 학교>는 책 한장 한장을 넘길 때 마다 '아 좋다, 좋다'를 외치며 즐거움을 주었던 책이다. 책의 저자인 이서희 작가는 몇년 전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됐다. 그 후 그녀가 올리는 주로 연애에 관련된 경험과 통찰에 관한 글들을 참 재밌게 봐왔었는데,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책까지 읽게 됐다. 작가 자체도 매력적이고 그녀가 올리는 글들도 재밌게 보긴 했지만 책이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 좋았던 구절들을 한 번 정리해보려고 당시 정리해뒀던 한글 파일을 오늘에서야 다시 열어보았는데. 나의 소개팅 실패 이유가 구구절절히 적혀있는 것이다.




유혹의 전제가 되어야할 것 역시 타자성의 발견이다. 상대가 나와 다름을 깨닫는 것.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대의 욕망을 살피고 탐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즐거움과 너의 즐거움이 만나는 자리를 고민하고, 어느 순간 우리의 즐거움이 부쩍 가까워진 것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유혹의 가장 큰 보상이다. 물론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은 두렵고도 지난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거부당할까 두려워 도망가기도 하고 공격적 태도로 미리 무장하기도 한다. 유혹은 이와 같은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상대임을 설득하며 가가가고 또 상대를 자발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일이다. 설득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장 큰 키워드는 유혹이란 '타자성의 발견과 인정'이라는 것이다. 


나의 시각에서 상대를 재단하고 판단내리고, 나와 다르단 이유로 먼저 벽을 쳐버리면 그 어떤 관계도 시작될 수 없다. 나와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 인정하며 그 부분에서 서로를 조율하고 맞춰보면서 서로간의 관계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유혹의 과정이다.


유혹은 과정을 통해 관계의 성질이 어디까지 나갈 것인가 깨닫게 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알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각각의 시차를 둔 깨달음일 때도 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유혹하는 자에게나 유혹당하는 자에게도 필연적이지 않다.


유혹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곳으로의 문을 여는 초대의 행위이다. 그러나 당신을 구원하거나 그 세계에 영원토록 머물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니다. 유혹에서 사랑을 선불처럼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유혹은 관계의 적정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일이다. 삶의 좌표가 변하듯 관계의 좌표도 움직인다. 때로는 느리게,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도 말이다.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유혹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유혹을 통해 관계의 성질은 계속 달라진다. 꼭 당장 연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타이밍이 다를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친구과 연인 어디쯤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이서희 작가 개인의 다양한 연애 경험을 적절한 소설적 가미를 통해 재미있게 풀어내는데 그 관계들 역시도 하나로만 규정되지 않고 다양한 선상에서 다양한 채도를 띄고 있다. 사실 소개팅이 불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자꾸 답을 내야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3번쯤 만나면 이거, 아님 저거로 결정을 내야하는데 아무래도 난 3번 안에 무언가를 결정할만큼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바로 그 3번째 만남을 피했던 것이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소통'이다. 


누군가를 유혹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상대를 알아가고,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내어주고, 동시에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잘 유혹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과 얼마나 잘 소통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는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벌어지는 유혹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공감과 연민, 더 나아가 설득의 소통 과정에 더 가깝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며 더 크고 더 세밀한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선 열려있어야 한다. 상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하고, 내가 가진 틀 안에 상대를 가두지 않고 열려있는 태도로 상대와 대화해야한다. 우리는 사귀기 전에는 어느 정도 소통을 시도하다가 관계가 규정된 후에는 소통을 닫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을 내 안에 가두려하고, 내가 가진 틀에 맞추길 바라며, 상대와 이야기하기보단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을 바란다. 그것이 지속되다보면 서로를 옥죄고 갉아먹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소통에는 자기 성찰이 뒤따른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맞는지, 이것이 상대가 원하는 것인지, 이것이 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말이다. 자기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상대와의 소통을 통해 내 태도를 수정할 수 있는 자세. 일방향적인 소통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소통과 피드백의 과정. 즉, 누군가를 처음에 hook 하는 유혹이 아니라 서로의 끊임 없는 유혹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나아갈 수 있다.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배우자 가치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배우자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사람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가치는 비슷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공유하는가의 문제였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나게 같은 부류로 보였던 사람들이 더 거슬리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자세의 문제였다. 드러나는 매력은 금세 사라진다. 한두차례 데이트를 해보면 알게 된다. 드러나는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호감을 느끼고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곧바로 삶의 자세의 문제로 넘어갔다. 결론을 말하면, 차라리 세계를 바라보는 데 모호한 입장을 견지해도 자기성찰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 더 편했다. 그들은 대화와 설득이 가능했다. 상대를 존중하는 버릇이 몸에 밴 사람,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 일상이 된 사람만큼 안정을 주는 이는 없었다. 가까워짐을 이유로 나를 압도하려 하지 않고 존중과 관심, 예의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삶의 오랜 습관이자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감수성의 영역이다. 배려와 자기 성찰의 감수성이 몸에 밴 사람은 유연하다. 함께 대화하고 더불어 변화하는 과정이 편안하다. 함부로 지배하려 하지 않는 자세는 나 역시 마음 깊이 상대를 존중하게 한다. 무작정 가르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묻고 상대를 알고자 노력하는 것. 동시에 꾸밈없이 그러나 부담 없이 드러내는 일. 일상을 나누는 사람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선 게을러지지 말 것.


누군가를 계속 유혹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촉을 곤두세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하고, 알게된 후에도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아야하며, 나 자신을 유연하게 변화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아주 좁게는 연인관계부터 나아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까지도. 이서희라는 작가가 매력적이었던 건 이런 유혹적인 태도를 잃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세상에 살고싶은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