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완벽에 대한 반론>
최근 즐겨보고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Black Mirror)>는 기술 발달이 고도화됨에 따른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다. 예를 들어, '증강현실'이 고도화되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 만든 아주 자극적인 게임을 만든다거나, 내가 죽고나서도 내 뇌는 따로 서버에 저장되어 '뇌파만으로 가상의 세계'에 영원히 살 수 있다거나, 아니면 죽은 사람의 디지털 기록을 조합하고 '인공 지능'을 통해 죽은 사람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무언가를 개발한다거나 하는 것들.
평소에 어디선가 들어봤던 증강현실, 인공지능, 뇌파와 같은 기술적 언어들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기발한 상상력과 아직 우리의 실제 현실에는 나타나지 않은 기술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굉장히 놀랍다. 또한 보고 나면 묵직한 메시지와 답답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본 에피소드는 <인간과 학살 (Men against Fire)> 이었는데, 효과적인 전쟁(혹은 학살)을 위해 군대 기술이 발달했을 때를 가정한 에피소드로 인간의 본성과 전쟁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과거의 전쟁 기록 특히 수거된 소총을 살펴보면, 인간의 본성은 전쟁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실제 수거된 소총은 장전만 되고 사격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누군가를 죽이는데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치뤄야하기에 군대에서는 그런 인간의 두려움과 죄책감을 덜어주는 효과와 장치를 만들어왔고, 바로 그 기술이 극도로 고도화됐을 때의 미래를 이 에피소드는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 에피소드에서 나의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전쟁의 '이유'다. 왜 그렇게까지 기술을 극도로 고도화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섬뜩하게도 그것은 나치와 아주 닮아있었다.
(넷플릭스의 저작권 문제로 넷플릭스 화면을 캡쳐하니 대사만 나온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서 던지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DNA 정보를 분석해, 이 사람의 특성을 알 수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린 어디까지 그것을 허용할 것인가?
미리 질병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것까지? 아님 좀 더 나아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 보다 좀 더 똑똑한 유전자를 갖는 것 까지? 아니면 <블랙미러>에서 처럼 아예 그런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인류에 우수한 유전자만 남기는 것까지?
이렇게 답답한 질문을 마주하면 내 마음도 한 없이 무거워지는데, 거기에 답을 한 책이 있다. 바로 마이클 샌델의 <완벽에 대한 반론> 이라는 책이다. DNA를 파악하고 조작하여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과 기술의 발달에 대해 '반론'을 쓴 책이다. 다만 책의 논지는 충분히 논리적이지만, 완벽해지길 바라는 사람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 기술의 발달을 막기엔 어려워 보인다. 기술의 발달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기술 짱! 을 외치며 와아아 달려드는 현재에, 그게 정말 옳은 것이냐고 묻는 이 책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블랙미러 역시도 마찬가지다.) 점점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워지는 기술의 발달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묵직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고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아래는 이 책을 읽고 썼던 독후감이다.
최근 일본 유전자학회가 ‘우성’과 ‘열성’에 대한 유전 관련 용어를 개정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성’과 ‘열성’은 유전자의 특징이 나타나기 쉬운지에 대한 여부를 표시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우성은 뛰어난 것으로 열성은 뒤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성은 현성(눈에 띄는 성질)으로, 열성은 잠성(숨어있는 성질)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유전자 변이는 다양성이라는 용어로 바뀔 예정인데, 이는 유전 정보의 다양성이 사람마다 다른 특징이 된다는 유전학의 기본 목적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우성과 열성의 용어를 바꾼다고 해서, 우성적 성질을 추구하고 열성적 성질을 없애려는 인간의 욕망까지 바꿀 수 있을까. 유전자가 다양한 것이 사람마다 다른 특징이 된다고 하지만, 과연 지적 능력, 외모, 운동 능력에 대한 유전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을 할까. 나의 유전 정보가 태어날 때 랜덤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혹은 돈을 주고 내 아이의 유전자를 미리 구성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있기는 할까 싶다.
그것은 ‘완벽에 대한 추구’가 비단 유전자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서 수없이 반복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능력에 서열을 매기고, 남보다 서열을 높이기 위해 경쟁한다. ‘나’로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나의 ‘열성’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그걸 ‘우성’으로 고치기 위해 돈을 써서 수술을 받고, 호르몬을 맞고, 사교육을 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가 서열 매기기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제 본 기사에서는 영화배우 문소리가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그 기사의 베스트 댓글은 ‘문소리는 자연스럽게 늙어서 예쁜 것 같아요’ 였다. 저 기사와 문소리의 외모평가가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그나마 자연스럽게 늙은 걸 칭찬한거니 괜찮다고 해야하나..) 매일 순수한 노력이나 본질과는 상관없는 서열이 매겨지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댓글이었다.
하지만 이를 더 어렵게 만드는 건 샌델도 지적했듯이 뒤틀린 자유주의적 관점이다. ‘완벽의 추구’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서열매기기에 대해 비판을 하면 “내 돈으로 내가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반론이 그러하다. 정말 저렇게 반론을 해버리면 할 말이 없다. 그래, 저 사람이 자기 돈 들여서 하겠다는데 내가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할 권리가 있나, 내가 나의 관점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오지랖을 부리는 건 아닌가, 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대유행(?)중인 자유주의적 혹은 개인주의적 관점을 묘하게 뒤집어쓴 반론이기에, 거기에 반론을 했다간 요즘 가장 질타를 받는 오지라퍼가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샌델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는 동시에 나도 우성적 유전자로 채워진 나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욕망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샌델은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있어야 하고, 읽혀야 하는 이유다.
개인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개개인 스스로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마음의 불편함을 느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완벽에 대한 반론>은 청각장애인의 사례를 통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어려운 질문으로 시작해, 그 이유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생명공학에서의 윤리는 물론 기술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렇다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지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남들이 완벽을 추구하니까 따라서 추구하고, 국가에 돈이되는 기술인 생명공학은 무조건 지원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한 번쯤 스스로의 욕망과 기술의 윤리적 문제를 되짚어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최근 한 컨퍼런스에서 카카오의 뉴스 추천 방식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무조건 노출 수를 늘리기 위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어떤 뉴스가 가치있는 뉴스인지 또 어떤 뉴스가 알아야하는 뉴스에 대한 고민이 담긴 알고리즘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네이버 뉴스만 보던 나는 다음 뉴스도 함께 보기 시작했다. 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고도화보다는 기술에 대한 가치판단이 함께 있는게 좋았고, 자극적인 사건사고 뉴스말고 내가 알아야 할 뉴스가 메인에 있는 플랫폼이 좋았다. 그러한 뉴스를 내가 계속 읽기 위해선 그 알고리즘이 흥행에 실패하지 않도록(?) 한 명이라도 더 읽어야하므로,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샌델이 이 책을 낸 이유도 같을지 모른다. 그가 살고싶은 세상은 삶을 주어진 선물로 인식하고, 그래서 노력하고, 때론 실패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서로 연대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그러한 사회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야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우연이 만들어 내는 여백이 있는 사회에서 살고싶기 때문에 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본 유전자학회의 결정은 매우 옳은 결정이었다. 단어 하나로 우성에 대한 열망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교과서의 용어까지 바꾸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샌델이 말하는 '마음의 습관'도 바꿀 수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