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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Jan 13. 2019

그 날 성산에 내린 겨울비는

비오는 성산과 벙어리의 시간

커튼을 젖혔다.

밤이 저물고 나니 달라진 세상.


비바람을 내심 기대했었는지,

외투를 대충 걸치고 맨발로 테라스로 나갔다.

반갑다, 네가 우도구나.



이제 어디로 갈까.

어젯밤 자기 전 생각 좀 해볼 걸 싶었나.

날이 지나서야 차에 올라 A와 내비게이션을 살펴보다가,

툭 튀어나온 그 곳의 풍광이 멋질 것 같아서,

익숙한 이름의 그 곳으로 가본다.

「섭지코지」


진입로에 들어서며 속도를 줄이던 우리는 결국 차를 세웠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네.」


관광지 안에 과도한 친절함과 북적임은

비 내리는 성산을 걷기에 적절치 못했을 것이다.



때마침 해안가로 내려갈 수 있는 작은 샛길이 있었다.

목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철저한 방음의 공간으로의 길.



햇볕이 들지 않던 그 날 바닷가 현무암들은,

더욱 짙고 무겁게 바다를 등지고 있었다.


비와 구름의 밑에서 모든 것들이 색채를 잃어갈 무렵,

현무암은 풍경의 깊은 바닥에 스스로를 깔고,

작은 풀과 바다와 하늘의 생기를 살려낸다.


과연, '흑'의 저력.



다시 돌아오는 길. 내비게이션에 특이한 해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광치기해변」

이 곳에서는 일출봉이 바다 건너 가까이 보이는 것 같다.


갯바위들 위로 이끼들이 고루 발라진 모습들이 영락없는 녹차초콜릿.

만조에는 바다가 이 바위들을 다시 제 안으로 삼킨다고 한다.

매일 그렇게 삼키고 토해내는 과정에서 피어난 이끼들.


갯바위 사이 작은 물구덩이에는 어느 누가 살련가- 구경하던 중

바위틈 이끼 사이로 제 몸을 숨기려 하는 작은 게 한 마리를 만났다.

그 때 언젠가부터 뇌리에 강하게 스며든

어떤 작가의 바디감 강한 스파게티 4행시가 떠오른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 느낄 때

파-도에 밀려온 미역 떼기 하나도

게-에게는 마지막 이유일 수 있다

티-안 나는 인생도 훌륭한 인생이다.


지금의 나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존재의 이유일지.



「김 사장, 커피 한 잔 어떠한가.」

또 다른 김 사장인 A와 '라운딩' 후 커피 한 잔으로 잠시 몸을 녹였다.


이 허허벌판에도 스타벅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스타벅스로 모인 것만 같다.

낯선 섬 위에 마치 내가 기댈 곳은 여기 뿐이라는 듯.

스타벅스를 찾아온 사람들은

조금 전 조용함에서 느꼈던 여유는 온데간데 없이,

바이브 섞인 카페음악과 쉰소리 나는 커피머신 소리와,

바리스타의 3단고음과, 옆 테이블의 대화소리에 묻혔다.

모두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적당히 앉아있었다 싶어 다시 길을 나섰다.



조용한 곳이 다시 필요하여 비포장 뚝방길로 운전대를 돌렸다.

겨울에도 유채꽃이 있던가- 노란색 꽃밭이 한 구석을 차지했고,

조금 더 지나니 그 외딴 뚝방길에 민가도 한 채 있었다.

산책로가 갈라지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데크를 따라 걸었다.



육지로 파고 들어온 바닷물은 파도없이,

다만 바람에 따라 파르르 떨고 있었고,

수면 위로 올라온 바위들이 그 바닷물의 구획을 나누어 놓았다.


바닷물이 따뜻했다면,

도로로 성치 않고 인적도 드문 이 곳은,

나만이 아는 비밀의 노천온천 정도로 적당치 않았을까.

비밀의 공간은 밖에서 볼 수 없게끔 꽉 막힌 공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일거니.



가벼운 산보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서며,

어떤 벽화가 그려진 폐공장 앞에서 잠시 서성이기도 했다가,



어느덧 평대까지 이르렀고,

때마침 내 책을 입고한 책방이 가까이 있었다.


사장님께는 지나가다 들린 손님으로 인사를 건네고,

내 책은 잘 있는지, 진열대에 올려진 책들을 쭉 살펴보는데,

어라- 내 책이 없다.


실망의 기운이 찾아올 때쯤,

어느 책을 들어올렸더니,

까꿍-

여기 있었구나.

이 낯선 섬에 나보다 더 먼저 와 있던 녀석들. 반갑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낯선 섬에서 만나 하나로 이어진 순간.

행복했다.



따끈한 고기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창가 너머 바다를 보니,

초점이 흐려지며 노곤해진다.


고기국수집 옆 어느 집 담벼락에 그려져 있던

아이들이 낚시하는 그림을 보며,

나는 겪어보지도 않았던 누군가에 추억에 잠시 흐뭇해하다가,

말 그대로 눈이 반쯤 감긴 A를 보니,

일단 숙소로 돌아가 낮잠을 자는 게 좋겠다 싶었다.



숙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났더니,

그제서야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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