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재유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on Jan 19. 2019

불나방이 날아오를 무렵

성산포 달 아래 가장 따스한 불빛을 찾아

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바다와 볼록 솟은 오름이 자취를 감추고

오늘을 영 아쉬워하는 태양만이 구름 사이로 드리운다.

숙소 앞 굳건히 서있던 야자수 하나는 청록빛을 잃어버리니

그처럼 단출하고 고단하기 짝이 없다.


불나방으로 다시 피어날 수 밖에 없는 이 어둑한 밤에

나는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하나.



밤이 되니 더욱 세차게 부는 바닷바람에 한컷 몸을 웅크리다

따뜻한 황색등이 자리한 그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제 혼자 잘나버린 백색등과는 달리, 황색등은 모닥불처럼 온기를 품는다.

유리전구의 가장 안쪽 구석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가느다란 필라멘트는

기적을 만들고 역사를 써내려간다.


호텔 프론트 어두운 벽면 한 쪽을 환히 밝히던 수십 개의 작은 모닥불들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생각나게 한다.



따뜻해진 마음을 보리소다로 달래볼까 싶어,

늑대가 세발자전거를 타는 어느 펍으로.

공연이 있을 모양인지 스테이지 위엔 키보드와 마이크가 자리했다.

낯선 곳에서 만날 낯선 예술가.


늘 바쁘게 돌아가는 나날 속에선 새로운 예술가를 받아들이기도 벅찰만큼,

나를 가장 덜 자극하는 것들도 주위를 감싸왔는데,

오늘만큼은 그 어떤 새로운 자극에도 나는 괜찮아질 것 같다.



무대에 오른 두 남자는 모두가 아는 노래로 주위를 한참 맴돌다가,

마이크를 잡은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스리슬쩍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는 빛바랜 달에 비친 기억을 돌아보며 '그대'를 찾다가,

달빛을 끝내 삼켜버린 구름을 미워했다.


달을 보며 감정에 변화가 찾아오는 건, 인류보편적 현상인지-

김건모는 서울의 달과 술을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거니와,

밴드 라벤타나는 달 아래서 그 이를 잊지 못하며 향월가를 불렀다.


밤이 되면 까닭모를 이유로 머리를 부여잡고 벽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파르르 떨리던 한 손을 다른 한 손이 꼭 잡아주며 밤을 지새우던 때에는

두려움과 외로움과 분노로 달 아래 앉아 많은 시간을 보냈건만,


어둠의 시간들을 충분히 지내고 나니 이젠 밤이 찾아와도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조용한 재즈를 깐 다음, 따뜻한 황색등 옆에서 누워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다가 잠에 든다.



제주맥주로 목 한 모금 축이니 과실향이 입 안으로 퍼지며,

이제 겨우 첫 잔인데 취기가 코끝으로 전해진다.

불나방으로 날아오기 직전, 가까스로 녀석을 동여잡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날 성산에 내린 겨울비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