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까지 가는 길, 북해도 #1
무탈히 잘 지내던 나날이었다. 아이스커피 한 잔에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볕좋은 주말이면 공원에 나가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풍경을 즐겼다. 종종 숨을 헐떡일 만큼 바쁜 시간들이 찾아오긴 했으나, 훌륭하게 잘 소화해냈다.
다만 밤이 길어지던 가을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알 수 없는 초조함에 한참을 뒤척이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은 채 긴 밤을 버텨내길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부쩍 쌀쌀해진 아침 날씨에 문득 달력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며칠 뒤면 잠시 이 곳을 떠나 북해도에서 겨울을 미리 맞게 될테니.
출발 전날 밤 짐을 챙기다 문득 거울을 보다 발견한, 나도 모르게 생긴 이마에 선명한 주름 세 줄. 마음을 겉으로 내보이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그 동안을 버텨온 어떤 한 사람에게 남겨진, 지워지지 않을 자국.
끝내 그 날 밤 역시 잠에 깊게 들지 못한 채, 동이 트기도 전 짐을 챙겨 공항으로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 귓속을 맴돌던 익숙한 노래 하나.
And all of this life moves around you
For all that you claim
You're standing still
You are moving too
- Alexi Murdoch, ‘Song For You’
북해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가 갓 넘었음에도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늘 그렇듯 겨울은 따뜻하고 활기찼던 날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별안간 쏜살같이 찾아왔다. 미처 맞을 준비를 하지 못했더라도 겨울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어느 때보다도 하루해가 일찍 지던 그 겨울섬의 첫 날 찾아오던 어둠 앞에 나는 친구 L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은 채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의 매무새를 채 단정히 갖추지 못했음에도 마치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도 어쩔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한 시간 쯤을 쉬지 않고 떠나왔을 무렵 시코츠 호수에 도착했다. 넓은 호수의 저 편 먼 산등성이 뒤로는 곧 제 모습을 숨길 것만 같던 태양 위로 이파리 하나 없는 나뭇가지들이 아쉬운 듯 태양을 향해 손을 뻗치고 있었다.
끝으로 다다르는 시간 속에 태양은 야속하게도 실컷 애를 태웠다. 결코 누구도 그 노을을 거스를 수 없는 순리 – 그것이 낯설지 않았던 건 정해진 이별이 있었던 그간의 이야기들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나.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살아냈고 만들어냈던 삶 한 꺼풀을 떼어낼 수 밖에 없는 – 슬픔, 아쉬움, 미련, 안도감, 허전함 – 셀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이 질서 없이 뒤섞인 결말의 시간은, 예상 외로 그 호수의 물결과 같이 잔잔했다.
추운 북해도의 겨울에도 얼지 않을 만큼 한없이 깊다던 그 호숫가를 바라보며 어렴풋이 기억나는 서너 조각의 미련을 호수를 향해 던졌다.
그렇게 미련없이 호수를 떠나 다시 움직이던 자동차는 크고 작은 고개를 넘으며 점점 더 많은 눈으로 덮인,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도로 양 옆에 두껍게 쌓인 눈과 저편의 산봉우리 뒤로 종적을 감추던 태양에 그 동안 마음에 피어났던 단어들을 모두 묻었다. 그건 그 겨울 동안만큼은 내 가장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채 편히 잠이 들고 싶어서였다.
밤이 되어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린 노천온천에서 여독을 풀고 료칸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J와 L의 얼굴을 마주했다. 온종일 차에 타서 각자의 시선에서 차창을 바라보다보니 같이 여행을 왔음에도 좀처럼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었다.
식탁에 맥주와 사케, 위스키를 한껏 늘어놓고 상기된 두 친구의 얼굴을 보니 그제서야 실감이 나던 겨울섬 여행. 웃고 떠들며 호수에서 남긴 사진들을 살펴보다보니 한껏 기분에 취해 그 많던 술은 어느샌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잠시 J와 밖으로 나가 맥주 몇 캔을 사서 돌아왔으나, 취할 대로 취해버린 L이 문을 잠근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깊은 밤 불 꺼진 료칸 로비에서 다급하게 직원을 찾아 도움을 받으며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던 그 기억은,
해결되지 않던 몇 가지 문제와 마음을 잠시나마 철저히 겨울섬에 쌓인 눈 속에 묻어버린 후 처음으로 적재된, 마냥 무심하지만은 않던 그 겨울의 첫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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