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악후월, 작은 언덕에서 달을 기다리다

겸재정선박물관과 소악루에서

by 심온 Simon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곳을 다시 찾는 것을 선호한다. 여행지의 설렘과는 다른, 이미 알고 있는 풍경이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줄 때의 그 감각이.


겸재정선박물관에서 '소장품 다시보기' 라는 기획전이 열렸다. 알고 있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외에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이따금 산책삼아 종종 다니는 인왕산 아래의 곳곳은 '장동팔경첩'이라는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동팔경첩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수성동 계곡도 있었는데, 오늘날 수성동의 모습도 작품과 비슷한 듯하다.


꼭 먼 곳으로의 여행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머무는 곳 주변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겸재 정선의 시선이 꼭 나와 같다. 그렇게 익숙한 곳을 포근히 여기고 관찰하다보면 설렘을 조금은 누그러뜨린 채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더 깊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역시 생각했던가. 진경산수화의 '진경'이란 단순한 사실주의를 넘어서 멀리 가지 않아도 익숙한 곳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겠다.


박물관을 나와 소악루에 올랐다. 몇 번이고 올라 익숙해진 소악루에 앉아 바라본 강 건너편 언덕이 녹음을 가득 담을 때를, 잎이 다 떨어져 덤덤하게 고동빛을 머금을 때를 나는 기억한다. 겸재 역시 양천 현령으로 부임하여 수없이 올랐을 그 누각. 그는 소악루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인생의 마지막 진경을 갈무리했다.


작은 언덕 위에서 달을 기다리는 일은 풍경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찰나의 온도를 기다리는 일이며,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고 오직 나와 풍경만이 남는 고요한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조급함 없이,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달빛이 강물에 닿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치열하다. 그 지극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진경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렇듯 풍경을 담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고백하는 일.